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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조리마수리346
요리조리마수리34623.09.01

고려시대 태조 왕건이 만든 '훈요10'의 의의는 무엇인가요?

고려 태조 왕건이 호족 통합 정책으로 결혼 정책을 실시하여 많은 자녀를 두었다고 들었습니다. 삼국시대를 통일했던 그가 야심차게 만든 10가지 내용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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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훈요 십조는 고려사에 수록된 고려 태조가 후손에게 남겼다는 열가지 가르침으로 고려왕실의 헌장으로 태조의 신앙, 사상, 정책, 규범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헌이라 할수있습니다.

    제 1,2조는 사찰의 남조에 따른 양적 확대를 경계한 조항으로 특히 제 2조의 전반부는 제 1,2조에서 지적한 폐단에 대해 대응책으로 제시한 것으로 도선비기에서 산수의 순역에 따라 점쳐 놓은 지역에만 사원을 건조하라는 내용입니다.

    제 3조는 고려왕실의 왕위계승에 관한 내용으로 고려에서는 대개 이 방법이 준수되었고 제 4조는 태조의 대외국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태조의 주체성을 엿볼수 있으며 제 5조는 태조의 도참사상과 함께 그가 서경을 중요시했음을 알게 해줍니다.

    제 6조에서는 사람과 신이 동락하는 국풍이라 할 수 있는 연등회, 팔관회를 경건히 할 것을 당부하며 제 7조는 중국의 고전철학을 인용, 제 8조는 왕실의 비밀훈계로서 일반 신민에게 공개할 성질의 것은 아니었으며 제 9조는 녹봉과 임관에 관한 내용과 국방안보에 관한 훈계, 제 10조는 태조의 유교주의적 정치철학의 일단을 보여줍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10조는 1.불교숭상 2.절의 쟁탈과 마구 금지 3.왕위계승 적장자 4.거란배격 5.서경중시 6.불교행사중시 7.공평무사한 일처리8차령이남사람 등욧 금지 9.백관의 기록중시 10.옛일을 거울삼아 지금을 경계할 것 등입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훈요 10조는 고려의 시조인 태조가 본인의 가치관을 후대에 전달한 것으로 그 당시 시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훈요십조」는 태조의 정치철학과 당시의 시대상황을 잘 나타내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제1·2조는 사찰의 남조(濫造)에 따른 양적 확대를 경계한 조항이다. 특히 제2조의 전반부는 제1·2조에서 지적한 폐단에 대해 대응책을 제시한 것으로, 『도선비기』에서 산수의 순역에 따라 점쳐놓은 지역에만 사원을 건조하라는 내용이다.


    제3조는 고려왕실의 왕위계승에 관한 내용으로, 고려에서는 대개 이 방법이 준수되었다. 제4조는 태조의 대외국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태조의 주체성을 엿볼 수 있는 조항이다. 제5조는 태조의 도참사상(圖讖思想)과 함께 그가 서경을 중요시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제6조에서는 사람과 신이 동락하는 국풍이라 할 수 있는 연등회·팔관회를 경건히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제7조는 중국의 고전철학을 인용한 말이며, 제8조는 왕실의 비밀훈계로서 일반 신민에게 공개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제9조는 녹봉과 임관에 관한 내용과 국방안보에 관한 훈계이며, 제10조는 태조의 유교주의적 정치철학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훈요십조」의 각 조항에는 말미에 ‘중심장지(中心藏之: 마음에 간직하라)’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훈요십조」는 하루 아침에 지은 것이 아니라 태조가 평소에 틈틈이 기록해 두었던 것을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다시 정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훈요십조」는 발견 경위와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즉 일본인 학자 가운데 이마니시 류[今西龍]등이「훈요십조」가 후세 사람의 위조라고 주장한 것이다.


    『고려사』 최제안전(崔齊顔傳)에 의하면, “신서와 훈요는 병란(兵亂)에 분실되었는데, 최제안이 이미 죽은 최항(崔沆)의 집에서 얻어 바침으로써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병란’이란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권신 강조(康兆)의 난(1009) 아니면, 그 이듬해(1010)에 개경까지 쳐들어온 거란성종의 침입을 의미하는 것 같다. 특히 후자의 병란 때에는 개경의 궁궐과 여러 중요 건물이 불타버렸고『사기』등 문헌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그래서 몇 년 뒤인 1013년(현종 4)에 사국(史局)을 열고 최항과 김심언(金審言) 등에게 명해 국사[實錄]를 편수하게 하였다. 편찬 도중 최항은 1024년에 죽고, 덕종 때에 이르러 황주량(黃周亮) 등에 의해 태조로부터 목종에 이르기까지 7대의 실록이 완성되었다. 이때가 대개 1034년(덕종 3)경이라고 추정된다.


    그런데 최제안이 왜 최항의 집에 갔으며, 또 최항은 어떠한 경로로신서·훈요를 소장하게 되었는가는 검토할 문제이다. 최제안은 대유학자 최승로(崔承老)의 손자로, 역대에 벼슬한 중신인데, 아마 최항 사후에 수사(修史)의 책임을 맡고 사료를 채집하기 위해 최항의 집에 갔다가 우연히 그것을 발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최항이 소장한 그것은 궁중비전(宮中秘傳)의 헌장이므로, 부본이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원본을 사장(私藏)했는가가 문제로 남는다.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학설이 있다.


    우선, 최항이 목종에게 직접「훈요십조」원본을 받았다고 보는 학설이 있다(이병도). 최항은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의 사촌 아우인 최언위(崔彦撝)의 손자로서, 성종·목종·현종 3대에 걸쳐 벼슬한 근신이다. 권신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세울 때 목종이 신왕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궁에서 쫓겨나 시골로 내려가자, 최항은 목종을 시종하였다. 이때 목종은 최항에게 “이 변란이 모두 나의 부덕한 소치이니 누구를 원망하랴. 다만 시골로 내려가 여생을 마치려 하니, 그대는 아무쪼록 새 임금에게 말을 전하고 또 그를 잘 보필하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고 한다. 그런데 목종은 도중에 강조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되었다. 이 때 목종이 궁중에서 지니고 나온 태조의 신서·훈요를 최항에게 맡겨 신왕에게 전하도록 한 것을 그가 사장한 것으로 추측된다.


    다음으로 이전부터 최항의 집에 대대로 전해오던 것으로 보는 학설이 있다(김상기). 이는 최언위가 태조의 사부 역할을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가 태조의 훈요 내용을 미리 알아 집에 베껴두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마지막으로 최항이 1010년(현종 1) 거란성종의 침입 시 피난을 가면서 궁중의 기밀문서를 집에 보관한 것으로 보는 학설이 있다(김성준). 최항은 현종이 즉위하자 그의 사부가 되었는데, 거란 침입 때 현종이 피난을 가자 그가 궁중을 살펴보다 옛 문서를 집으로 가져가 보관하였고, 이후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어 7대 실록의 편찬책임을 맡았을 때 수사관 최제안을 시켜 집안의 문서를 정리하던 중「훈요십조」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한편,「훈요십조」가운데 제8조가 조작되었다는 학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마니시 류는 태조대에 후백제 출신들이 많이 등용된 것을 근거로 제8조항이 후대인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영향을 받은 일부 국내 학자들은 후백제 지역 사람들이 태조 때부터 별다른 차별 없이 등용되었음이 확인되기 때문에 제8조항의 내용은 그 일부가 조작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제8조에서 말하는 ‘차현 이남’과 ‘공주강 외(外)’를 원문 그대로 인정하여 차현 이남, 공주강 밖 사람들이 차별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러한 지역적 범위에 대해 후백제 전체 지역으로 보는 견해, 후백제 중심지였던 전주 권역으로 보는 견해, 후백제와는 무관한 공주·청주 일대로 한정하여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훈요10조는 태조 왕건의 유언입니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왕건은 943년 세상을 떠나기 석달 전에 중신 박술희를 불러 훈요10조를 남겼다고 하는데 이것은 후대 고려의 왕들이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정치를 잘 이끌러 가길 바라는 선대왕의 염려 섞인 유언 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훈요 10조는 태조 왕건이 후손에게 남긴 유언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새겨야 할 내용을 요약한 것이에요.


    훈요 10조에는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으니 불교를 장려할 것, 연등회와 팔관회를 성실하게 열 것, 절은 도선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세우고 함부로 짓지 말 것, 중국의 풍습을 억지로 따르지 말고 특히 거란의 언어와 풍습은 본받지 말 것, 서경을 중요시 할 것, 관리들의 녹봉을 함부로 가감하지 말고, 농민들의 부담을 가볍게 할 것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어요.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후대 왕에게 불교를 중시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라는 의미를 담아 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