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장수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당시 고려의 경계는 서북방면에서는 압록강이 자연경계를 이루어왔고, 동북방면은 궁예 의 관할관도였던 패강13진 의 동북한계인 정평 까지였습니다. 그러나 압록강구와 정평을 잇는 중간 내륙지역은 미한정경계지역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지역에 성책을 축조함으로써 국경선이 됨과 동시에 두 지역의 분리기능을 취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장성의 축조가 가능했던 것은 변계에 살고 있는 여진족들이 아직 정치적으로 미숙해 마을단위로 산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다.
동시에 천리장성에 대한 고려의 인식은 국경선으로서의 의미 외에, 여진족 및 거란족에 대해 고려는 문화적·혈통적으로 다를 뿐 아니라, 우위에 놓임으로써 이들과 혼효 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화적 구분선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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