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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흑로12
빼어난흑로1223.02.24

조선시대에는 태풍이 오면 어떻게 대응했나요?

조선시대에는 요즘 같은 기상청이 있는것도 아닌데 태풍 오는걸 어떻게 알았나요? 그시대에 초가집은 이엉같은 거하고 나무 그런걸로 지붕을 만들고 했는데 그럼 태풍 피해가 엄청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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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8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측우기 관측 기록을 이용하여 홍수설계의 신뢰도를 향상시켰다고 하네요 도움이 되실까하여 관련된 글 링크 남기니 참조해보세요



    ▶ 조선시대 역사기록을 홍수 재해 예방에 활용


    <출처 뉴스와이어>


    https://www.newswire.co.kr/newsRead.php?no=350607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농사짓는 농민들은 날씨를 보고 큰비(태풍) 올거 같다 판단하면 논의 물을 빼고 농수로를 미리 손보고, 수해 예상된다면 높은곳으로 대피 아니면 집에서 나가지 않기 이게 전부 다였습니다.

    그리고 태풍이 지나간 뒤 수령들은 재산 인명피해를 파악해 보고하며 장계까 조정에 올라오면 임금이 보고 피해가 큰 지역에 대한 구휼을 명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조선시대 당시에는 일기예보가 없어서 태풍을 대비할 수가 없었습니다.그리고 제주도에 상륙했을 때에는 제주도가 섬이라는 특성상 배를 이용해서 한성에 보고를 해야 하는데, 상식적으로 태풍이 부는데 배를 타고 한성에 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죠. 마찬가지로 부산의 경우에는 태풍이 상륙하면 말을 타고 직접 가서 보고를 올려야 되는데, 당시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려면 말을 타고 쉬지 않고 달리는 파발을 띄워도 최소한 5일은 기본적으로 걸렸음. 즉, 보고하러 도착할 때 즈음에는 태풍이고 나발이고 서울도 모두다 초토화 상태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보고하려면 봉화를 올리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상식적으로 태풍이 부는데 무슨 수로 불을 지펴서 봉화를 올림? 설령 올린다고 하더라도 그런 기상 상황에서 연기를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덧붙여서 조선시대 때는 최고로 빨리 보고 하는 게 봉화 아니면 파발이었음. 파발의 경우에는 장계를 올릴 때 부산에서 서울까지 빠르면 3일. 보통은 5일 정도가 걸렸음. 근데 생각해보니 태풍이 불면 도로고 뭐고 다 붕괴되고 산에는 물이 불어나서 통행자체가 안 될텐데 파발은 어떻게 잘려갈지 아무쪼록 일기예보를 볼수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태풍을 고스란히 피해를 받지 대비는 불가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농사짓는 농민들은 날씨를 보고 태풍이 올거 같으면 논의 물을 빼고 농수로를 미리 손보고 수해가 예상되면 높은곳으로 피신하거나 집에 머무르는 등이었고

    태풍이 지나간 후 수령들은 재산, 인명피해를 파악해 보고하고 피해가 큰 지역에 대한 구휼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네 맞습니다. 지금 보다 더 피해가 어마 어마 했었죠. 예를 들어 조선 왕조 실록에 1414년(태종 14) 8월 4일에는 “밤에 큰바람이 불어 전라도 조선(漕船) 66척이 패몰(敗沒)하여 익사한 자가 200여명이었고, 침수한 쌀·콩이 5800여석이었다”는 기록, “충청도 홍주 등 여덟 고을에 태풍이 불었다. 곡식이 모두 쓰러져 거의 다 손상되었고 초목이 부러졌으며 지붕의 기와가 다 날아갔다”는 1529년(중종 24) 7월의 기록, “황해도의 평산·토산·우봉에 태풍이 불고 큰비가 내려 냇물이 불어 넘쳐 물가의 전답이 태반이나 침몰되었다. 강원도 철원에 태풍이 불고 큰비가 내려 큰 나무가 뽑혀서 넘어졌다”

    이렇듯 태풍 때문에 몇 백명이 죽고 다치는 일이 허다 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기상청이나 천문대와 같은 현대적인 관측 시설은 없었지만, 태풍이 오는 것을 예측하고 대처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풍수전'이라는 책을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일기 예보, 태양 및 달의 움직임, 별자리 등을 통해 날씨를 예측하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태풍이 올 때는 군사적으로 경계를 높이고, 국민들은 경보 시스템에 따라 대피를 했습니다.

    또한, 초가집이나 나무로 지은 집이 태풍에 노출될 경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조선시대 건축 기술에 맞는 지붕 방식이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집 지붕의 경사를 높이고, 지붕 재료로는 짚이나 벽돌, 청자 등이 사용되어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국왕이나 대신이 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특별히 제사를 지내고, 새해맞이나 경제적인 문제 등의 때에는 기상 전문가들이 예측을 하기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태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태풍이 많이 일어나면서도 기상청이나 예보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농작물과 주택 등이 큰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태풍 대비를 위한 다양한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우선적으로 정부는 태풍 정보를 전하는 역할을 하는 "태풍보"를 만들어서 주요 도시에 설치해 두었습니다. 이는 통보선과 더불어 태풍이 오기 전에 일찍 발령을 내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태풍이 발생할 때마다 관료나 방방곡곡에서는 대피소를 마련하여 사람들이 대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농업 분야에서는 태풍에 대비하여 풍속에 맞게 이쑤시개를 이용하여 벼나 토마토 등의 작물을 지탱해주는 방법이 사용되었으며, 주택 분야에서는 집을 지을 때 태풍이 오면 날아가지 않도록 지붕을 강화하는 등의 대책이 있었습니다.


  • 조선 시대에 태풍에는 큰 대처를 할 수 없었습니다. 단지 평소보다 바람이 심하게 불면 태풍이 오겠구니 하고 미리 밭에서 추수를 다 해서 저장고에 저장해놓고 사람들은 집에서 나오지 않았어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