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학이라는 것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우리나라의 배산임수라는 것이나 묏자리를 쓴다던지 이런 풍수지리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던것인가요? 실제로 이런 풍수지리학을 믿게 되었던 근거는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의 풍수지리의 기본개념은 땅의 형세를 인간의 길흉화복에 관련시켜 설명하는 자연관의 하나로서, 풍수지리, 지술, 음양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풍수에 의하면 땅은 생적의 존재로서 만물을 키우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 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인간에게 주는 혜택도 달라진다고 한다. 길한 정기가 왕성한 장소에 터를 잡으면 그 자손들이 부귀영화와 장생을 누리지만 반대로 흉기가 있는 장소를 택하면 불행을 겪는다는 것이다. 풍수에서는 인간의 성쇠가 완전히 하늘과 땅에 의해 정해진다고 믿는다. 유래는 흔히 신라 말기에 불교 선종의 승려들[5]이 중국에서 수입했다는 설이 대세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생설[6], 신라 중기 도입설 등도 근거가 있어 여전히 논의되는 상태이다. 일단 물기가 샘솟는 땅에 만든 원성왕릉(괘릉)[7]이나, 여러 신라 왕릉들이 좌북조남의 원칙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은 사례[8]를 봐도 신라 하대까지는 적어도 후세 사람들이 생각하는 풍수지리는 도입되지 않았거나, 알려져 있었더라도 왕실과 귀족계층도 크게 신경쓰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도입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신라 때도 전불 7처[9] 같은 고유 신앙의 길지라는 개념은 있었지만 중국식 풍수지리와는 기준이 달랐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에서 풍수지리학문이 역사적으로 눈에 띄게 성장한 것은 후삼국시대로, 신라 말기 이전 도입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 이전에는 극히 일부 지배계층만의 고급 지식이었다고 주장한다.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의 호족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선종과 함께 인기를 끌고, 사회 전환의 추진력이 됐을 때였다. 호족들은 저마다 자신의 근거지를 서라벌 못지 않은 명당이라고 주장해 자기 권위를 확립하였으며, 지방에서 어느 정도 커진 호족들은 이를 사상적 기반으로 신라에 대한 반란 루트를 타기도 했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발전하여 조선시대 초기에 하륜을 시작으로 점차 번성하게 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 사람이 살아가는 땅인 양택을 중심의 풍수학설이 사람이 죽은 뒤에 묻히는 땅, 음택을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설화나 야사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신라시대에는 석탈해가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호공의 집을 뺏었다고 하며 고려시대에는 왕건의 아버지가 도선대사의 풍수지리로 왕기를 받기 위해 패강진 송악산 부근 즉 개경에 자리잡았다고 하는데, 이는 주거 중심의 풍수지리의 학설을 반영하는 이야기이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묏자리가 좋았던 덕에 왕이 되었다, 세종의 묘를 잘못 써서 장손이 망했다, 흥선대원군이 묏자리를 '만 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두 사람의 황제가 나오는 자리'에 잡아서 대한제국의 말로가 비참했다는 등 묏자리 중심의 풍수학설을 반영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조선시대의 사대부 유학자들은 '풍수지리는 미신 같은 괴력난신이니, 그렇게 풍수가 중요하면 공자님이 왜 한마디도 언급을 안 했냐느니 이런 걸 추종해서야 되겠냐'고 신나게 떠들다가 조상 무덤 자리는 풍수지리 상으로 좋은 곳에 잡으려고 몇 대에 걸쳐서 산송을 일삼곤 하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여주었다. 실제로 밑에 보면 알겠지만 하륜과 정도전 모두 유학자였다. 하지만 하륜은 풍수에 유화적이었고 정도전은 강경하게 배척했다.
현재의 풍수학설은 민간에서는 토착신앙 비스무리한 것이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묏자리 잡는 용도로 사용되는 일종의 미신 취급을 받지만, 그래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조상 묘는 명당에 모시려 기를 쓰고 있으며 관공서나 건물의 입주 등 실생활에도 응용되고 있다. 국립묘지, 박물관, 시청과 도청 급의 건물들은 모두 풍수를 고려하여 위치를 선정한다고 하며[10], 홍콩은 도시 자체가 풍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심지어 세종특별자치시 건설에서도 풍수지리가 고려되었다.[11] 정치에 이용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물론 정치에 이용된 것치고 좋은 결말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기업 건물이 풍수지리 자문을 받아 짓는다는 이야기는 이미 도시전설의 영역.
위에서 풍수지리의 본격적 도입이 후삼국~고려초라고 했듯, 한국사에서 풍수지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도시는 단연 개성으로, 도시 배치 자체가 송악산 자락의 지형에 최대한 맞춰져있다. 궁궐인 만월대를 둘러싼 궁성은 시가지 서북쪽 끄트머리를 차지하고 있고, 궁궐의 정문은 동향으로 나 있으며, 도로망 역시 바둑판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 당나라 도시계획의 영향을 받아 궁궐이 도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바둑판처럼 방리 구획으로 도시를 개발한 부여군, 경주시[12], 서울특별시를 생각하고 개성시가지 지도를 들여다본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체제도 어찌하지 못한 개성의 그 난개발스러움에 적잖이 당황하기도.... 고려는 한국 양택풍수의 최전성기였던 시기로, 묘청이 풍수지리에 입각해 천도대상지로 건설한 평양 대화궁도 드넓은 대동강변이 아닌 평양 동북쪽 입불산 기슭에 있다. 서울로 따지면 풍수지리 좋다고 경복궁을 우이동에 박아넣은 꼴이다.
지금의 경복궁 한성부는 세간에 파다한 인식과 달리 그다지 풍수지리의 영향을 크게 받은 도시는 아니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북악을 좌청룡, 목멱산(남산)을 우백호로 동향하여 궁궐을 배치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낙타산(동대문 옆 낙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로 하여 南面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통 유학자인 정도전은 중국의 모든 황궁과 고려의 궁궐도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임금이 남면해아 하는 것이 유학의 덕목이라고 주장했다. 애초에 형세가 좋다고 하여 처음 도성공사를 시작한 곳은 계룡산 신도안이었고, 신도안 건설이 중지된 이후 천도논의에서 이 분야 전문직인 서운관 관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소명당, 즉 송악 잔류를 강력하게 밀었으며, 그 와중에 하륜의 무악천도론도 제기되었다.[13] 이런 모든 논란을 일거에 잠재운 것이 명에 사신으로 출장갔다가 돌아온 정도전으로, 그는 "쟤들이 음양술수 소리만 해대는데 중국사 봐도 그딴 거 없습니다."라며 한양 천도를 반대하는 풍수쟁이들을 대차게 디스하기도 했다.도시의 입지 선정에 있어서 북악을 진산과 주산, 주맥 등을 따지는 수준의 기본적인 배려는 있었으나 기존에 아마도 풍수에 입각해 지었을 남경 이궁은 완전히 배제해버리고, 대신 북악산 아래에 네모 반듯한 형태로 경복궁을 새로 지었다. 처음부터 풍수지리를 최대한 따졌다면 아마도 창덕궁과 같이 비뚤어진 모양새가 되었을 것이다.[16]
과학적 근거는 거의 없다시피하지만, 숭례문 화재 당시 수호상인 해태상이 이전되고, 서울역 앞에 있다던 화기를 가라앉히는 연못은 사라진 지 오래고, 군부 군사 정권 하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육사 출신이 정부 관료들이 퇴진하고 관악산 서울대학교 출신 고위직이 많아졌을 때 비로소 숭례문에 화가 났다는 말도 있다.
오늘날 매스컴에서 논하는 풍수는 거의 말장난으로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식이 많다. 성공한 사람이 많이 나오면 대충 말로 둘러대서 이러쿵 저러쿵하여 말빨로 대충 처리한다.
미스터리, 심령 프로그램도 많이 다루는데, 프로그램 연출을 아주 무섭게 한다.출처: 나무위키 풍수지리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시대에 중국의 풍수지리 이론이 도입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사신도신앙 · 음양오행설, 그리고 점상술(占相術) · 참위비기류(讖緯祕記類) 등이 수입되어 풍수지리와 유사한 관습이 있었다는 흔적이 있습니다.
고구려를 침공하였던 관구검(毌丘儉)의 묘를 보고 당시의 유명한 음양가가 묘형이 고독한 상형을 이룬 흉격이기 때문에 장차 멸족의 화를 당하리라는 예언 내용의 기록, 선덕여왕이 여근곡(女根谷)이라는 산 모양 때문에 백제의 매복군사를 발견하였다는 설화, 신라 제4대 탈해왕이 토함산 위에 올라 초사흗날 달처럼 생긴 지세를 보고 자기의 살 터라고 생각하여 그곳을 사술로 빼앗은 이야기, 고구려 · 백제의 고분벽화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 등이 그 예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라 원성왕 때에는 『청오경』이 수입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있어 풍수지리가 도선(道詵) 이전에 도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로부터 본격적으로 풍수사상을 받아들인 것은 도선에 의해서입니다.
도선은 최치원(崔致遠)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선문구산파(禪門九山派) 중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의 개조 혜철(惠哲)로부터 인가를 받아 전라남도 광양의 옥룡사(玉龍寺)에서 독자적인 선문을 개설하고 있던 승려입니다.
그가 중국인 일행으로부터 직접 풍수지리를 전수받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나, 대체로 그의 이론을 습득한 것만은 분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행은 위도를 측량하고 역법을 정리하기도 한 매우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사람이었는데,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도선의 풍수지리설도 극히 경험주의적 입장에 경도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도선과 그의 제자들은 국토를 오늘의 인문지리학적 시각에 가깝게 재해석하여 한반도 지체 구조의 가장 큰 특징인 경동지괴(傾東地塊)를 파악하였고, 수도의 위치가 동남방에 편재된 경주보다는 중부지방이 더 낫다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고려 개국의 이념적 · 실리적 바탕을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의 풍수는 신라 시대에 전래되었으며 한국 전통의 대지모 사상과 중국의 음양오행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신라 말에는 도선(道詵)과 같은 대가가 나왔다. 그는 대개 중국에서 기원하여 발달한 참위설을 골자로 지리소왕설·산천순역설 및 비보설(裨補說)을 주창하였다.
-출처:위키백과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풍수지리의 역사와 서적
예로부터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또는 생활의 편리를 위해서 자기가 생활할 터전을 찾아왔다. 원시사회에서는 좋은 자리를 찾으면 먹고 쉬고 자는데 편리했다. 뿐만 아니라, 적으로부터 자신과 동족을 보존하고 번창시키는데 용이했다. 이렇게 풍수지리는 안전편리하면서 발전 가능한 땅을 찾는데서 발생하였다.
풍수지리학의 기원은 상고시대까지 소급해 가지만, 이는 초기의 형성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이론이나 응용면에서 체계를 갖추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2000여 년 전 중국 후한(後漢) 때 음양이치에 통달한 청오자(靑烏子)라는 사람이 풍수지리의 원전(元典) 격인 『청오경(靑烏經)』을 저술하여 반포한 것이 풍수지리학의 역사적 기원이 되었다.
(1) 한(漢)나라 시대와 『청오경(靑烏經)』
중국 한(漢)나라 시대는 조상의 묘지가 후손에게 영향을 준다고 믿어왔다. 후한 장사가 효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우리나라 부족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부족연맹체 중 가장 고도의 문화수준을 가진 부여(夫餘)는 조상숭배와 영혼불멸을 믿어 장례식을 후하게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그들은 여러 달에 걸친 장례식을 영광으로 알았고 많은 부장품(副葬品)과 심지어는 순장(殉葬)까지도 행하였다. B.C. 37년 경 주몽(朱蒙)이 이끄는 부여의 일족이 건국한 고구려(高句麗) 역시 후장(厚葬)이 행해졌고 금과 은 등 보배를 부장(副葬)하여 적석총(積石塚)을 만들었다. 옥저(沃沮)에서는 온 가족을 한 곽(槨)에 매장하고 곽 주위에다 미곡(米穀)을 두어 사자(死者)의 식량으로 하는 등 영혼불멸의 사상에 근거한 가족공동 묘지가 행해졌다.
『청오경』은 작자미상의 책으로 후한 때 저술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후대의 위작(僞作)이라는 설도 있다. 『청오경』이라는 책이름에서 편의상 작자를 청오자(靑烏子)라고 부른다. 청오자는 백살을 넘게 살다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선인(仙人)이라고 전해진다.
『청오경』의 내용은 음양 이법과 생기 그리고 산의 형상에 대해서 매우 간결하게 기술하였다. 문장 한 구 한 구를 비결이나 격언처럼 열거해 놓아, 읽는 것만으로는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난해함으로 인하여 후세의 학자들에게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를 제공하였는데, 가장 오래된 책이므로 장경(葬經)으로 존중되었다. 그 후 당나라 사람 양균송(楊筠松)이 주석(註釋)을 달아 해석을 하였다. 원문은 편(篇)이나 장절(章節) 구분 없이 사자일구(四字一句)의 한 문장으로 연속되어 있다.
조선시대 지리과(地理科) 과거시험에는 『청오경(靑烏經)』 『금낭경(錦囊經)』 『호순신(胡舜申)』 『명산론(明山論)』이 4대 필수과목이었다. 그 중에서 『청오경』과 『금낭경』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2) 진(晉)나라 시대와 금낭경(錦囊經)
지금으로부터 약 1700년전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즈음하는 중국의 진(晉)나라 때 사람 곽박(郭撲, 276-324년)이 『청오경(靑烏經)』을 인용하여 『금낭경(錦囊經)』을 저술하였다. 그는 책 곳곳에 ‘경왈(經曰)’하면서 『청오경(靑烏經)』을 인용하였다. 이 때문에 『청오경』을 장경(葬經)이라 하고, 『금낭경』은 장서(葬書)라고 부른다.
『금낭경』은 상하(上下) 2권 8편으로 되어 있다. 전체 내용이 간략하고 짧아 모두 2000 여자(字)에 불과하지만, 간결하면서도 군더더기가 없다. 또 다루고 있는 범위가 매우 넓어 풍수고전 중에서 최고로 친다.
상권(上卷)은 제일(第一) 「기감편(氣感篇)」, 제이(第二) 「인세편(因勢篇)」, 제삼(第三) 「평지편(平支篇)」, 제사(第四) 「산세편(山勢篇)」, 제오(第五) 「사세편(四勢篇)」이다.
하권(下卷)은 제육(第六) 「귀혈편(貴穴篇)」, 제칠(第七) 「형세편(形勢篇)」, 제팔(第八) 「취류편(取類篇)」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풍수지리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을 내리고, 풍수의 이론과 실천을 전체적으로 기술함으로서 풍수지리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장서를 『금낭경(錦囊經)』이라고 하는 어원은 다음과 같다.
당나라 황제 현종이 지리를 잘 아는 홍사(泓師)라는 신하를 자주 불러서 산천의 형세를 물어보았다. 그 때마다 홍사는 장서를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어느날 현종이 홍사에게 그 책을 요구하였다. 홍사는 책을 받치면서, 이 책은 세상에서 귀한 책으로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비보서(秘寶書)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현종은 이 책을 비단으로 만든 보자기 즉 금낭(錦囊)에 넣고 다시 장롱 깊이 넣어 보관했다. 이때부터 『금낭경』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금낭경』은 당나라 연국공(燕國公) 장설(張說)과 승려인 홍사(泓師), 역시 승려인 일행(一行) 등이 주석을 달아 설명한 판본(板本)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지리과(地理科) 과거시험에서 청오경과 함께 배강(背講, 암기)의 필수과목이었다.
(3) 당(唐)나라 시대
우리나라의 통일신라시대에 해당되는 당나라 때는 모든 문화가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풍수지리학도 마찬가지로 크게 발전하였다. 이 때는 간단한 나경패철(羅經佩鐵)을 이용하여 방위와 좌향(坐向)을 측정하기 시작하였다. 양균송(楊筠松), 장설(張說), 홍사(泓師), 장일행(張一行), 증문적(曾文迪), 요금정(寥金精), 복응천(卜應天) 등 풍수지리학 방면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별호가 구빈선생(救貧先生)인 양균송은 『청낭경(靑囊經)』, 『감용경(?龍經)』, 『의용경(疑龍經)』, 『사대혈법(四大穴法)』, 『도장법(倒杖法)』 등을 지어, 그때까지만 해도 한낱 술법으로 전해 내려오던 풍수지리설을 체계적인 학문으로 정립하였다. 특히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론은 묘나 집의 좌향(坐向)을 결정하는데 사용해왔는데, 오늘날의 풍수지리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시조인 도선국사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일행선사(一行禪師) 장일행(張一行)은 곽박의 장경을 해석하면서 나라의 땅을 화식지지(貨殖之地: 재화가 많이 나는 땅), 용문지지(用文之地: 문사가 많이 나오는 땅), 용무지지(用武之地: 무관이 많이 나오는 땅) 등으로 나누어 자연 환경을 관찰하였다. 또 『대연역분도(大衍曆分度)』를 저술하였다.
소문관학사(昭文館學士)를 지낸 복칙외(卜則巍)는 『설심부(雪心賦)』를 저술하였는데, 문장이 간결한 형기학(形氣學) 위주의 책이다. 이를 청나라 사람 맹천기(孟天其) 등이 주석을 달아 설명하였다.
(4) 송(宋)나라 시대
우리나라의 고려시대에 해당되는 송나라 때의 풍수지리학은 이기론(理氣論) 방면에 크게 발전하였다. 소강절(邵康節, 1011-1077년)은 하도와 낙서의 도수를 응용한 『방원육십사괘도진(方圓六十四卦圖陳)』을 만들어 산수(山水)의 방향을 측정하여 길흉(吉凶)의 연도를 계산하였다. 이는 이기(理氣) 분야를 하나의 독립된 계통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소강절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아 유교의 역철학(易哲學)을 발전시켜 특이한 수리철학(數理哲學)을 만들었다. 즉, 『주역(周易)』이 음과 양의 2원(二元)으로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있음에 대하여, 그는 음(陰).양(陽).강(剛).유(柔)의 4원(四元)을 근본으로 하여, 4의 배수(倍數)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하여 조선의 유학과 정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주자(朱子, 1130-1200년)도 풍수지리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송나라 황제 효종이 죽자, 능 선정과 관련하여 후임 황제 영종(寧宗)에게 「산릉의장(山陵議狀)」을 보냈다.
주자는 ‘풍수의 핵심은 산세의 아름답고 추함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주자의 「산릉의장」은 조선 풍수지리에 일종의 지침서가 되었는데, 조정(朝廷)에서 풍수를 논할 때 그 내용이 자주 언급되었다.
이 밖에 남송국사(南宋國師) 덕흥(德興) 전백통(傳伯通)은 『감여요약(堪輿要約)』을 저술하였고, 역시 남송국사이며 전백통의 제자인 추중용(鄒仲容)은 『대리가(大理歌)』를 지었다.
(5) 명(明)나라 시대
우리나라의 고려 말과 조선 중기에 해당되는 명나라 때의 풍수지리학은 오늘날의 풍수지리학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에는 협소한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 폭넓은 수용자세로 연구가 활발하였다. 그 중에서도 구성법(九星法)의 응용으로, 이기론(理氣論) 분야에 새로운 학설이 개척되었다. 또 나경 학설의 발전으로 더욱 세밀한 부분까지 묘 자리와 집터를 측정하여 시간과 공간을 서로 연관성 있게 다루었다.
이때 호순신(胡舜申)의 『지리신법(地理新法)』, 북암노인(北巖老人) 채성우(蔡成禹)의 『명산론(明山論)』, 서선술(徐善述), 서선계(徐善繼) 쌍둥이 형제의 『인자수지(人子須知)』, 추정유(鄒廷猷)의 『지리대전(地理大典)』, 조정동(趙廷棟)의 『지리오결(地理五訣)』 등이 저술되었다.
1) 호순신(胡舜申)의 『지리신법(地理新法)』 조선조 지리과 과거시험에 임문(臨文)의 필수과목 중 하나였다. 호순신은 명나라 봉의랑 통판 서주군주 주관학사(奉議郞 通判 徐州軍州 主管學士)라는 관리다. 『호순신(胡舜申)』이라고도 불리는 『지리신법(地理新法)』을 편찬하였는데, 상하(上下) 2권 23장으로 되어 있다. 그 목차는 다음과 같다.
상권(上卷)은
서문(序文), 오행산도(五行山圖), 1) 오행도(五行圖) 2) 오행론(五行論) 3) 산론(山論) 4) 수론(水論) 5) 탐랑론(貪狼論) 6)문곡론(文曲論) 7) 무곡론(武曲論) 8) 보필거문론(輔弼巨門論) 9) 염정론(廉貞論) 10) 파군론(破軍論) 11) 녹존론(祿存論) 12) 형세론(形勢論) 13) 택지론(擇地論) 이고
하권(下卷)은
14) 삼십육룡론(三十六龍論) 15) 주산론(主山論) 16) 용호론(龍虎論) 17) 기혈론(基穴論) 18) 좌향론(坐向論) 19) 방수론(放水論) 20) 연월론(年月論) 21) 조작론(造作論) 22) 상지론(相地論) 23) 변속론(辨俗論), 결론(結論)이다.
2) 『명산론(明山論)』
이 책도 조선조 과거 음양과 지리학 중에서 『청오경』, 『금낭경』 다음으로 나오는 책으로 임문(臨文)의 1위에 놓여져 있는 책이다. 북암노인(北巖老人) 채성우(蔡成禹)가 지리에 통달했던 어느 선인(先人)의 저작인 『명산록(明山錄)』을 교정하고 보충해서 개정한 것이다.
책 내용은 서문, 본론, 발췌문 3부로 되어 있는데, 서문과 발췌문은 채성우가 쓴 것이고, 본문은 전해져온 『명산록』의 내용이다. 본문은 모두 13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1) 대역(大易) 2) 이기(二氣) 3) 십이명산(十二明山) 4) 절목(節目) 5) 혈법(穴法) 6) 입향(立向) 7) 명당(明堂) 8) 영맥(永脈) 9) 길흉사형(吉凶砂形) 10) 진룡(眞龍) 11) 귀겁(鬼劫) 12) 길귀(吉鬼) 13) 삼십육용순회(三十六龍順會)
3) 『지리인자수지(地理人子須知)』
명나라 세종 43년(1564년) 서선술(徐善述), 서선계(徐善繼) 쌍둥이 형제는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250여 종에 달하는 풍수 관련 책을 모아 이를 집대성한 다음,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오늘날 모든 풍수지리서의 지침서가 되고 있는 『지리인자수지(地理人子須知)』다.
이들 형제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장사(葬事)를 잘못 치른 것을 후회하였다. 그들은 부모의 유체(遺體)를 타인의 손에 맡기지 않고 자기 손으로 직접 하기 위해, 20세 전에 지리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60세 후에야 책으로 엮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은 지리를 형상(形象)과 이기(理氣)로 분류하여 조화있게 설명하였다. 내용은 용(龍), 혈(穴), 사(砂), 수(水), 명당(明堂)으로 세분하였고, 각 내용마다 그림을 그려 넣었다. 또 각 집(集), 각 책(冊)마다 유명한 사람들의 조상 묘를 답사한 예를 부가해 이론과 실제 상황이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모두 8집(集) 39책(冊)으로 되어 있다. 당시 중국에서 목판(木版)으로 간행되었다. 명대(明代)의 풍수지리 서적으로는 유일하게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과 ‘사고전서제요(四庫全書提要)’에 수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발행되는 풍수 책들 대부분이 이를 토대로 하고 있다.
『지리인자수지(地理人子須知)』란 책제목은 ‘지리는 사람의 자식이라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책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집(乾集) : 6책
제1책(第一冊) 범례(凡例) 및 인용한 감여서(堪輿書) 목록 등
제2책(第二冊) 용법(龍法), 중국의 산, 대간룡(大幹龍) 맥락(脈絡) 등
제3책(第三冊) 논제도(論帝都), 역대 도읍지 등
제4책(第四冊) 간룡(幹龍)과 지룡(枝龍) 등
제5책(第五冊) 지룡(支龍)과 농룡(壟龍), 지룡(枝龍) 등
제6책(第六冊) 태조산(太祖山), 소조산(小祖山) 부모태식잉육(父母胎息孕育) 등
감집(坎集) : 5책
제7책 용출신(龍出身), 개장(開?), 박환(剝換), 과협(過峽), 지각(地脚), 호송(護送)
제8책 방룡(傍龍) 정룡(正龍), 용의 노눈(老嫩), 장단(長短), 진가(眞假), 귀천(貴賤)
제9책 용의 주필(駐?), 행지(行止), 분벽(分擘), 면배(面背), 여기(餘氣) 등
제10책 용의 삼세(三勢), 삼락(三落), 입수오격(入首五格), 입혈12맥(入穴十二脈) 등
제11책 오성(五星)과 목화토금수 오성체(五星體) 등 설명
간집(艮集) : 4책
제12책 혈법총론(穴法總論), 와혈(窩穴), 겸혈(鉗穴), 유혈(乳穴), 돌혈(突穴)
제13책 혈성삼대격(穴星三大格), 혈성제형(穴星諸形), 불결혈(不結穴) 등
제14책 조산증혈(朝山證穴), 명당(明堂)증혈, 수세(水勢)증혈, 낙산(樂山)증혈 등
제15책 혈기론(穴忌論)에 대한 종류 및 설명
진집(震集) : 3책
제16책 정혈(定穴) 방법 및 종류 설명
제17책 양균송, 정자, 주자 등 옛 선사들의 혈기론(穴忌論) 설명
제18책 괴혈론(怪穴論) 설명
손집(巽集) : 5책
제19책 사법총론(砂法總論), 청룡(靑龍) 백호(白虎), 안산(案山) 조산(朝山) 등
제20책 사격의 전응후조(前應後照), 나성(羅城), 원국(垣局), 좌보우필(左輔右弼) 등
제21책 낙산(樂山), 하수사(下水砂), 수구사(水口砂) 등
제22책 관성(官星), 귀성(鬼星), 요성(曜星) 등
제23책 사도(砂圖) 및 사례 설명
이집(離集) : 8책
제24책 수법총론(水法總論), 득수, 취수, 거수, 수구(水口), 조수(朝水) 등
제25책 강호수(江湖水), 지당수(池塘水) 등 물의 종류 설명
제26책 명당론(明堂論), 길격명당과 흉격명당
제27책 수성론(水城論), 물의 오성(五星)에 대한 설명
제28책 구곡수(九曲水), 암공수(暗拱水), 창판수(倉板水) 등 수세(水勢) 설명
제29책 양기론(陽基論) 설명
제30책 설천기제입식가(泄天機諸入式歌) 등
제31책 풍수요역(風水要逆) 등 장사에서 피해야 할 방법 설명
곤집(坤集) : 2책
제32책 구성(九星) 이법 설명
제33책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음양(陰陽), 팔괘(八卦) 등
태집(兌集) : 6책
제34책 음양(陰陽) 활용방법, 24룡의 길흉, 쌍산의 길흉 등 설명
제35책 24룡과 길혈(吉穴)
제36책 이기론(理氣論)에 의한 길사(吉砂) 종류, 흉사(凶砂) 종류
제37책 24방위와 수법의 길흉
제38책 이기론(理氣論)에 의한 수법(水法) 설명
제39책 만년도(萬年圖)
4) 『지리대전(地理大典)』
추정유(鄒廷猷)의 『지리대전(地理大典)』의 본래 이름은 『지리대전입문요결(地理大典入門要訣)』이며 『인자수지(人子須知)』를 비롯한 많은 풍수서를 요약한 책이다. 대체로 『인자수지』의 축소판 같은 느낌을 준다. 『인자수지』 보다 내용은 간략하지만 읽거나 휴대하기에 간편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모두 7권으로 된 책으로, 목록은 다음과 같다.
권수(卷首), 총론(總論), 권1 용법(龍法), 권2 혈법(穴法), 권3 사법(砂法), 권4 수법(水法), 권5 양택(陽宅), 권6 오행(五行), 권7 나경(羅經)
5) 『지리오결(地理五訣)』
조정동(趙廷棟)이 저술한 책으로 용혈사수(龍穴砂水)에 향법(向法)을 강조하여 오결(五訣)을 만들었다. 물의 흐름에 따라 용혈사수향 이기법(理氣法)을 잘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구빈 양균송의 남긴 뜻을 근본으로 했다고 범례에 적고 있다.
(6) 청(靑)나라 시대
우리나라의 조선중기 이후에 해당되는 청나라 때의 풍수지리학은 택일(擇日)에 의해서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조명택일(造命擇日)을 중요시 여기면서 장택론(葬擇論)을 발전시켰다.
이 당시 왕도형(王道亨)이 작성한 『나경투해(羅經透解)』는 나경패철(羅經佩鐵)의 사용 방법과 원리를 해석한 것으로,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모든 나경패철의 지침서가 되고 있다. 최초의 나경패철은 단지 8개 방위로만 간단하게 사용되다가, 점점 발전되어 24 방위까지 세분되어 명나라 중엽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다 청나라 때에 이르러서 나경(羅經)에 여러 학설을 도입되어 더욱 세밀하고 복잡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나라 때는 세간에 많은 풍수지리학 문헌들이 난립하여 위서(僞書)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7)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역사와 서적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풍수사상이 전개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우리 고유의 자생적 풍수와 관련해서, 『삼국유사』에는 신라 4대 왕인 탈해왕(80년)이 집터를 잘 잡아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는 청룡[동], 백호[서], 주작[남], 현무[북]의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다. 현존하는 사찰 등의 지형지세를 미루어 보면, 삼국 초기부터 국가 경영과 국민의 생활 편리에 풍수가 실용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자생 풍수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통일 신라 말기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당시 선종 계통의 승려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하고 돌아오면서 풍수설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반 대중을 포교하는 방법으로 풍수설을 활용했다. 그 중에서도 도선은 이를 우리의 자생 풍수와 접목하여 풍수지리를 집대성한 것으로 미루어진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와 풍수설 그리고 도참사상이 사회를 이끈 주도적 사상이었다. 태조의 「훈요10조」에는 풍수적 사고 관념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2훈, 5훈, 8훈이다.
고려시대의 풍수설은 주로 승려들이 담당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도선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도선의 저술로 알려진 「비기(秘記)」에 따라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다. 묘청은 서경천도설을 주장하였고, 공민왕 때 승 보우는 한양천도설을 주장하였다. 신돈은 충주 천도설을 주장했으며, 훗날 나옹선사와 그의 제자 무학대사는 조선 개국을 도왔다.
조선시대에는 불가에서뿐만 아니고, 유가에서도 많은 풍수 명사들이 나왔다. 이성계는 역성 혁명에 성공하자, 정권찬탈의 당위성과 민심수습을 위하여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였다.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웠던 조선조에도 풍수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이에 음양과를 설치하여 과거시험을 통하여 지관을 뽑았다. 또한 사대부가에서는 풍수지리학을 모르고 행세할 수가 없었다. 선비나 승려들 사이에서도 기인이나 도사들이 많이 나왔다. 민간에서는 풍수설이 신앙화되어 음택이 널리 유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풍수지리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지나쳐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명당을 찾아 부모를 묻어 부귀영달하려는 이기적인 방법이 팽배해졌기 때문에, 묘지를 둘러싼 폐단이 심해졌다. 그리하여 정약용, 박제가 등의 실학자들은 그들의 저서를 통해 풍수의 폐단을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근대 개화기 들어 계몽파들은 풍수지리설을 크게 비난하였으며, 일제 점령기에는 미신으로까지 규정되었다. 일제는 풍수지리가 미신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의 식민지 통치에 철저하게 풍수를 이용하였다. 총독부가 중심이 되어 전국의 풍수 자료를 수집하여, 명혈의 지맥을 자르고 정기 맺힌 명산에 쇠말뚝을 박는 등 조선 민중들로 하여금 패배의식에 젖도록 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환경 문제가 대두되면서 다시 풍수지리가 활발하게 연구되고 도시 계획 등에 응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풍수 서적은 학문적으로 체계가 정립된 것은 없고 산서나 결록, 비기 등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실제로 산천을 돌아보고 전국 각지의 풍수적 길흉을 기술한 『도선비결(道詵秘訣)』, 『옥룡자결록(玉龍子訣錄)』, 『답산가(踏山歌)』, 『무학결(無學訣)』, 『남사고결(南師古訣)』, 『박상희결(朴相熙訣)』, 『나학천비기(羅鶴天秘記)』, 『일지유산록(一指遊山錄)』, 『일이답산가(一耳踏山歌)』, 『두사충결(杜師忠訣)』 등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지방의 사대부가나 객사 사랑방에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비결(秘訣), 결록(訣錄), 비록(秘錄), 답산가(踏山歌), 만산도(萬山圖) 등 산서비기(山書秘記)가 많이 있다. 이들 중에는 황당무계한 것도 적지 않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한편 일제 때 조선 총독부는 그들의 식민지 통치 자료를 얻고자 전국적인 행정력을 동원하여 풍수에 관련된 조사를 하였다. 총독부 촉탁 ‘무라야마지쥰(村山智順)’이 보고서 형식으로 조선 풍수설에 대한 방대한 자료집을 책으로 엮은 『조선의 풍수』가 있다. 이 책은 비록 순수한 연구 목적의 책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최초의 풍수설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로 오늘날 한국풍수지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풍수지리학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연구 자료가 발표되고 있다. 서적 또한 많은 주제와 내용으로 발간되고 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풍수의 기원에 관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고 합니다 하나는 한반도 자생설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으로부터 왔단 가설 입니다. 먼저 가장 극단적인 자생 풍수지리설의 주장은 구석기시대부터 그 연원을 찾고있는데 이에 의하면 한반도는 지형적인 구조에 있어서 산이 많은 까닭으로 산악과 산신에 대한 숭배사상이 구석기시대부터 전해져 내려 왔으며, 산신과 산악의 숭배사상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독특한 지석묘문화를 형성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풍수지리사상은 산악지대의 지리적인 환경조건과 산악숭배사상, 地母觀念, 영혼불멸사상 및 三神五帝思想 등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발생하게 되었으며, 檀君의 神市 선정, 王儉의 符都 건설, 지석묘 설치에서의 위치 선정 및 신라 탈해왕의 半月城 선정 등은 우리나라 고대에 풍수사상이 직접적으로 건축에 적용된 실례라는 것입니다. 결론은 원래 우리 자체의 풍수지리가 이미 이 나라에 있어 오다가, 백제와 고구려에 중국으로부터 이론이 확립된 풍수지리가 도입되면서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고, 결국 삼국 통일 이후에는 신라에도 전해져 한반도 전체에 유포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풍수지리사상은 신라 말 도선에 의해 전래되었으며, 이를 믿게 된 근거는 이 사상 자체가 새로운 왕조(고려)의 개창에 있어서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었기에 활용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소위 '송악명당설'에 근거하여 고려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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