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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슴새216
우람한슴새21623.05.05

이완용이 친일파로 넘어간건 계기가 무엇인가요?

이완용은 원래 친일파가 아니었고 일찌감치 고종의 신임을 받고 친미파라고 들었습니다.

거기다가 이러한 힘때문에 아관파천까지 주도한것으로 알고있는데요. 그렇다면 왜 이완용은 을사조약을 주도한 친일파로 노선을 바꾼 계기가 무엇인건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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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05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완용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관료로서의 능력은 출중하나, 그것을 매국에 악용해 아무리 명석한 사람이라도 돌이킬 수 없는 악행들을 저지르면 어떤 평가를 받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후술하겠지만, 이완용은 주위에서 총명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고 판단이 명확했으며 처세술에 능한, 흔히 말하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데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이완용과 비슷한 시기에 같이 매국 행위를 해 조선귀족 직위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이후 처신을 잘못하거나 재산 관리에 실패하여 일제강점기 중에 몰락하거나 패가망신한 사람도 많았다. 매국도 능력이 없으면 못 한다. 하지만 명석한 두뇌를 매국 행위와 개인의 이득을 위해 타인에게 크나큰 피해를 가하는 일에 사용했으니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 것. 아무리 개인의 능력이 백날천날 뛰어나 봤자 기본적인 인간 됨됨이가 글러먹으면 본인에게만 제외하고 타인에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관료로서의 능력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그가 광무개혁 중반에는 부친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등용되는 것이 불가능하였으나, 초반에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대신직이 아닌 관찰사직에 머물렀다. 당시 대신직에는 서자였던 김가진도 등용되었는데, 이완용이 안 될 이유는 없었다. (적어도 신분적으로는) 그래도 관찰사로서의 문제 해결 능력은 높이 평가 할 수 있다. 당장에 민생이 힘들었던 시절에 공덕비를 세운 것을 보기는 힘들다. 이러한 능력을 가진 다른 관료는 윤영렬 정도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악질적인 친일 행각으로 인하여 국내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라 하면 바로 이완용이 연상될 정도로 매국노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을 확고히 했다. 그가 사망한 지 97년이 된 현재까지도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비판받고 있다.

    현대에 와서조차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을사오적 중 나머지 넷은 몰라도 이완용만큼은 대부분 알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누군가를 이완용에 비유하는 것은 거의 서양 국가에서 누군가를 나치,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모욕으로 통한다. 심지어 중국에서도 우페이푸가 량스이를 비판할 때 모욕적 표현으로 쓰는 사례가 있었다.

    이완용과 동시기에 똑같이 매국노 짓을 한 송병준 같은 경우도 이 정도로 욕을 먹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면 생전에 이완용이 얼마나 대표적이고 악랄한 매국노였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심지어 그의 후손들도 국가를 상대로 환수된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승소까지 한 다음 외국으로 도망가는 악행을 저질러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출처: 나무위키 이완용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주 비열한 인간이라서 그렇습니다.

    아주 저만 살려고 하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한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저런 더러운 짓을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저만 살려는 더러운 이기심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