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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6.30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

카르타고와 로마의 전쟁은 재미있는 부분이 많은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한니발이란 인물은 미스터리 합니다.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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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니발이 알프스 산을 넘기로 한

    배경에는 그 과정에서 로마와 사이가

    좋지 않은 갈리아인들을 한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합니다.알프스를 넘는 과정에서 10만 군사가

    4분의 1로 줄었지만, 갈리아 부족에게 다시 인적·물적 지원을 받아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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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01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원전 3세기, 카르타고는 지중해 세계의 초강대국이었다. 기원전 8세기에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포에니 전쟁’의 ‘포에니’는 페니키아를 가리킨다) 카르타고는 지금의 튀니지 북쪽 해안의 카르트하다쉬트를 본거지로 해서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 서부, 이베리아, 몰타, 발레아레스 제도,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시칠리아의 일부까지 지배했으며 서지중해는 “카르타고의 허락 없이는 바닷물에 손을 담글 수도 없다”고 할 만큼 완벽히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의 앞선 해양력은 무역선을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와 서아프리카의 황금 해안까지 오갈 수 있게 했다.


    한편 농업도 발달해, 풍부한 밀 생산량은 무역을 하지 않아도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빈곤한 유럽 중서부에 수출까지 할 수 있었다. 카르타고는 이런 막강한 국력을 믿고 동지중해까지 판도를 넓히려 했다. 그 시작으로써 서쪽 절반만 지배하고 있던 지중해 중부 시칠리아 섬의 나머지를 손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뜻밖에 연이은 암초에부딪쳤다. 먼저 한니발의 언급에서 나오는 사람, 그리스 국가 중 하나인 에피루스의 왕이던 피로스가 카르타고의 야심을 막아냈다.그리고 그 다음 암초는 바로 로마였다.

    로마는 기원전 8세기경 성립되어 삼니움, 갈리아 등 이민족과 대결해 가며 차차 세력을 넓혔고, 3세기에는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달성했다. 통일의 마지막 장애물이 바로 에피루스의 피로스였는데, 그는 카르타고와는 반대로 동지중해를 기반으로 서쪽을 정벌해 세계를 통일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에 상륙해 로마를 매섭게 공격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그 다음 원정에서 시칠리아의 카르타고를 무찌르고는 다시 로마와 겨루었으나 패퇴하고 그리스로 돌아갔다가 전사하고 만다.


    피로스가 사라지자 지중해의 패권을 노리는 카르타고를 막을 세력은 로마뿐이었다. 로마의 국력은 카르타고에 비하면 약세였고, 특히 육전에는 강해도 해전에서는 카르타고에게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그래서 로마 원로원도 동맹을 맺고 있던 시칠리아 동부의 도시들이 카르타고의 침략에서 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과연 우리가 바다 건너 외국에서 싸워 이길 수 있을까?’하고 무척 망설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원정대가 로마를 출발했고, 이로써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된다(기원전 264년).

    의외로 카르타고 편이던 시칠리아 도시들이 배반하여 로마 편을 드는 바람에 로마군은 시칠리아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해군력 열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여겨, 총력을 기울여 새 함대를 건조했다. 그래도 카르타고 함대의 규모에는 못 미쳤지만, 로마의 새 군함은 적함에 걸쳐 놓고 보병대가 돌격해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적교를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카르타고 해군의 우수한 조함술을 따라잡을 수 있고, 바다에서도 로마의 장기인 백병전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효과는 확실해서, 로마는 기원전 260년 시칠리아 북부 해안에서 카르타고 해군을 격파한다. 이후 카르타고 본거지에 대한 공격에서는 참패했지만, 다시 시칠리아를 무대로 벌어진 공방전에서 결국 승리를 거두어 제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난다(기원전 241년). 로마는 이로써 카르타고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받는 한편 시칠리아 전체를 차지했고, 여세를 몰아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까지 손에 넣는다.

    제1차 포에니 전쟁 때 시칠리아에서 용병대를 조직해 로마군을 집요하게 몰아붙여, 한때 로마를 패배 직전까지 몰고 갔던 카르타고 장군이 있었다. 그는 하밀카르 바르카스라고 했는데, 패전 후에는 이베리아로 건너가 정복지를 넓히고 은광을 개발하기도 하며 카르타고의 손상된 국력에 보탬이 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229년 그만 암살당하는데, 배후에는 로마가 있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이 바로 한니발 바르카스였다.


    하밀카르는 어린 한니발에게 “네가 자라면 반드시 로마를 멸망시켜야 한다. 신과 아버지 앞에 맹세하거라.”라고 했다고 한다. 어린 한니발에게 로마는 아버지가 반드시 멸망시키고 싶어했던 나라요, 아버지를 죽인 나라였다. 그리하여 그가 기원전 221년에 26세의 나이로 이베리아의 카르타고군 총지휘권을 손에 넣자, 이베리아 북부를 공략 중이던 로마와는 날카롭게 대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는 지중해 연안의 도시 사군툼을 속령으로 선언하고, 카르타고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니발은 사군툼을 공격해서 점령해버렸다. 기원전 218년의 일이었고, 이것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시작되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이래 카르타고의 국력은 크게 쇠퇴했지만, 로마와 자웅을 겨루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카르타고 본국은 부패와 정쟁에 찌들어 있었다. 또한 민간인과 군인의 구분이 없던 로마와 달리 직업군인 제도가 전통이던 카르타고에서는 어떤 장군이 혁혁한 공로를 거두면 민간인 정치인들의 의심과 질투의 대상이 되는 일이 많았으며,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과 해상 무역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 사이의 다툼도 있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카르타고 본국의 도움을 포기한 한니발은 혼자 힘으로 로마와 싸우기로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발상의 대전환’을 했다.

    이전 전쟁에서 ‘로마는 육군의 나라이고, 카르타고는 해군의 나라다’라는 발상을 뒤집어 바다에서도 육지에서처럼 싸우는 방법을 개발하여 로마가 승리를 거뒀듯, 이번에는 바다가 아닌 육로로 로마를 침공, 육전에서 로마를 패배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로마가 서지중해에서만 카르타고 함대가 쳐들어오지는 않나 하고 감시하는 동안, 한니발은 4만의 병력으로 피레네산맥을 넘고, 갈리아를 통과, 다시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침입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뛰쳐나온 한니발군에게 로마인들은 혼비백산했다. 그래도 총 75만의 병력을 가진 로마군은 원정 과정에서 절반가량 줄어 이제는 2만 5천뿐인 한니발군을 간단히 무찌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한니발은 기병대와 코끼리부대(다만 코끼리부대는 그다지 실효성이 없었다는 지적도 있다. 코끼리부대는 결국 나중에 한니발의 발목을 잡는다)를 써서 로마의 중장보병을 뒤흔들어 놓고, 이를 다시 보병대로 밀어붙이는 전법으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특히 기원전 216년의 칸나에 전투에서는 로마군 8만 명 중 5만 명을 살육했으며, 이는 1916년 솜 전투 이전까지 서양에서 하루에 가장 많은 인원이 전사한 전투로 남았다.


    한니발은 나중에 ‘전략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전투의 여러 요소를 적절히 배합하여 통상적인 전투력보다 몇 배나 되는 힘을 끌어내는 천재였다. 또한 리더십도 뛰어났다. 이역만리 적지에서 17년 간이나 머무르면서도 대부분 용병인 한니발군은 전선을 이탈하거나 난동을 부리는 일이 없었다. “병사들과 함께 먹고 함께 자며, 자신의 이익은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적을 무찌를 생각에만 골몰해 있는” 한니발에의 마음에서 우러난 존경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그는 군사전략에는 뛰어났지만 정치전략에서는 실패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훌륭한 조국’을 갖지 못했다.


    소수 병력으로 적진 깊숙이 침투했을 때는 적의 머리를 쳐서 적진을 와해시키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한니발은 연승을 거두면서도 좀처럼 로마 시로 진격하려 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빙빙 돌며 17년을 보냈다. 그 까닭은 오늘날까지 완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인데, 소수병력의 한계를 잘 알고 있던 한니발이 로마군을 직접 전멸시키기보다 로마 연합에 소속되어 있던 동맹도시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기를 꾀했다는 추측이 가장 유력하다. 한니발이 보기에 로마는 이탈리아를 통일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단지 로마의 힘에 굴복해 복종할 뿐인 도시가 많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니발이 로마군의 주축을 깨트리면 기회라고 여겨 반란에 나설 도시가 많을 것이며, 그러면 로마는 저절로 멸망의 길로 가리라는 것이다.

    출처 : 인물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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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카르타고는 로마보다 국력이 훨씬 약해, 한니발은 로마를 전복하기보다 로마와 대항할 연합 세력을 구축하는데 전쟁의 목표를 뒀다. 한니발은 군사와 동맹을 확보하기 위해 갈리아를 통해 진격했다. 카르타고는 해전을 펼치기 위해 필요한 이탈리아 해안의 기지를 확보하지 못해서 지중해를 건너지 못했다.


    카르타고의 선박에는 날마다 250인분의 물과 식량이 필요했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면 해변에서 말리는 기간도 필요했다. 갤리선으로 바다를 지배하려면 지역의 기지를 확보해야만 했다. 한니발은 적당한 기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거대하고 효과적인 카르타고 함대를 사용할 수 없었다. 1차 포에니 전투에서 지면서 시칠리아와 사르테냐를 잃어 티레니아 해에서 카르타고의 해군 활동은 무력해졌고, 이탈리아 해안에 닿을 수 있는 해군의 능력도 제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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