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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스컹크183
우람한스컹크18324.01.11

조선에서 적극적으로 불교를 탄압하지는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조선은 숭유억불을 기조로 삼았던 국가이지만 적극적으로 불교시설을 폐쇄하거나 승려가되는것을 막지도 않았고 백성들이 불교를 믿는것도 제지하지않았는데 왜 이런 모습을 보인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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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유교 사회였고 불교가 배제, 고려 시대에 비해 쇠퇴한 것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불교의 종교적 역할은 사라지지 않았고 왕실이나 민간에서 유지되었습니다. 즉 윤회나 인과응보 등 불교의 사유 세계는 전통적 심성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또한, 내세의 명복을 빌고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관념과 현실의 재액을 피하고 기복적 성격으로 이어졌습니다.

    비록 조선 전기에 억불(抑佛) 정책이 시행되어 공식적인 폐불의 단계에 이르렀고, 대신 유교적 제의(祭儀)와 사후 관념이 불교를 대체하엿습니다. 그러나 명종 때 일시적으로 불교가 성행하고, 임진 왜란 이후 양반고 경적으로 성장한 부농과 상인들의 후원을 받아 사찰이 조성되고, 불교의 영향력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이는 불교의 생명력이 이어져 고려 이래의 전통을 계승하여 토착화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숭유억불은 유럽처럼 경쟁종교 제거나 이단말살같은게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불교 믿는다고 다 죽일 정도로 극단적으로 행동할 이유가 없긴 했는데....

    시설 폐쇄도 출가 막기도 다 했습니다?

    현대에 남아있는 유명 사찰 대부분이 산에 있는게

    도성에 있는 절을 모조리 폐쇄하고 산기슭절만 남겼기 때문이구요

    남은 절도 모든 토지와 노비를 몰수 당했고 추가로 사는것도 금지되었습니다

    승려는 도성출입이 금지 되었고 여자는 사찰 출입이 금지되고

    과거시험 승려 분야가 폐지되고

    11개 있던 종단을 억지로 2개종까지 줄인다음 (선교양종)

    도첩이라는 신분증으로 따로관리 되었는데

    이걸 적극적이지 않다고 하긴 ...좀... 그렇지 않나요?

    숭유억불의 목적은 고려말기에 불교승려라는 작자들이

    귀족들 돈받아 먹으면서 노비부려먹는 부패한 모습을 보였기 떄문에

    불교가 권력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어요

    물론 조선초기에는 불씨잡변 처럼 아예 불교자체가 해악이라는 의견이 많았지만

    현대처럼 인터넷이나 CCTV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천년넘게 백성들의 삶에 닿아있었던 불교를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릴 수도 없고

    일본도 중국도 아직 불교가 쌩쌩한데 불교싫다고 대놓고 말하고 다니면 외교적으로도 손해기 때문에

    숭유억불이 어느정도 진행이 된 다음에는 도첩제를 폐지하는 등 점차 규제를 완화한거고

    오히려 유교권력자를 견제하기 위해 왕족이 불교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때 승병들이 활약한 것을 계기로 어느정도 권위가 복구 되었구요

    그럼에도 아예 제도적으로 억제되는 불교가 몰락하는걸 피할 순 없어서

    일제시대때 기록에 불국사가 완전 박살나 있었던 거에요

    그런 거대한 유적을 유지할 수가 없었던 거죠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숭유억불이 주요정책이었던 조선시대에도 왕실과 민간에서는 여전히 많은 불경들이 제작되었습니다. 또 책 전체에 걸쳐 구결이 묵서되어 있어 불교사 및 중세 국어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종교로서 역시 불교를 들 수 있는데 조선에서는 처음부터 불교를 배격하고 유교를 숭상하였으나 오랜 기간에 걸쳐 번성하였던 불교 중심의 문화가 일시에 거세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이래로 불교의 폐단이 많았음은 사실이어서, 태조 때부터 이에 대한 개혁에 착수하였고 태종은 시종일관 불교 탄압정책을 써서 태조 때 제정한 도첩제(度牒制)를 더욱 엄하게 하고 전국의 사원(寺院)을 정비하여 242개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없애버리는 동시에 거기에 딸려 있던 토지와 노비는 모두 국가에서 몰수하였고 고려 이후 전해오던 국사(國師)·왕사(王師)의 제도를 폐하는 등의 조처를 취하여 불교는 큰 타격을 받았다. 뒤이어 세종도 처음에는 억불(抑佛)정책을 썼는데, 특히 불교의 7종파를 교(敎)·선(禪) 양종(兩宗)으로 통합하는 한편 전국에서 교종·선종에 각각 18본산(本山), 도합 36본산만을 인정하였으며, 서울 안에 있던 흥천사(興天寺)의 흥덕사(興德寺)를 각각 선종과 교종의 대본산(大本山)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태조의 왕사 무학(無學)을 비롯하여 많은 명승(名僧)들이 배출되었는데 세종은 만년(晩年)에 불교를 믿게 되었으며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죽은 뒤에는 경북궁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기까지 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유신(儒臣)들이 척불(斥佛)의 소리를 높였으나 왕실에서는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으며, 훈민정음이 반포된 뒤에는 불경의 언해(諺解)가 시작되었습니다. 세조는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처음부터 사원 및 승려의 보호에 힘썼으며, 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각종의 불경을 한국어로 번역해 내는 등, 조선시대 불교의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