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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엄한줄리엣나357
냉엄한줄리엣나35723.08.23

조선시대 홍국영이란 인물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과거 드라마 이산이라는 작품에서 홍국영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굉장히 긍정적으로 배역이 나와서 허구의 인물이 각색된 것인줄 알았는데

실제 존재했던 인물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홍국영은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었지만

권력의 맛을 알게되고부터 뭔가 잘못된 사람이었다 정도로만 알고있습니다.

실제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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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홍국영 하면 보통 우리는 정조 시대 처음 등장한 세도 정치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조선의

    황금기로 불리는 정조시대 초기에 등장했다가 사라진 비운의 권력자였다.

    (1) 출생과 초기 관직

    홍국영은 1748년 출생하였으며,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몰락한 양반'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는 본관 풍산, 자 덕로이며, 당시 외척 세력이었던 풍산 홍씨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권력에서 멀어진 선비였으므로 그는 상대적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듯 하다.

    그는 1771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종 9품)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772년 세자시강원 설서라는 정 7품직에 임명된다. 후에 그가 권력에서 축출되어 불우한 최후를 마친 뒤, 세간에는 그의 과거 급제가 부정행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의혹이 떠돌았다. 그만큼 그는 풍산 홍씨였으나 권력에서 멀어진 집안이었고, 학문 또한 배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자신의 약점이자 콤플렉스를 정조와의 만남을 통해 하나 하나 묻으려고 애썼다. 정조는 자신의 최대의 라이벌인 정후겸(1749~1776), 홍인한(1722~1776)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벽파 세력들과 생사를 건 대치상태였고, 특히 벽파 세력이 정후겸이라는 젊은 척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세자시강원의 젊은 설서 홍국영은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줄 존재였다. 따라서 자신의 콤플렉스를 만회하는 동시에 야망을 이루려는 홍국영과, 든든한 방패를 원하는 세손 정조의 만남은 곧 천운이었다.

    (2) 활동상

    벽파 세력들은 자신들에 의해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에 대해 엄청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당시 24세라는 어린 나이에 종 2품 병조참판에 올라 있던 젊은 척신 정후겸은 금서인 [정감록]에 심취해 있었고, 따라서 개혁적인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에 대해 언짢아했다. 기록에 따르면 정후겸은 권세를 이용해 사병을 조직하여 조련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곧 1776년 발생하게 되는 홍인한-윤양로 모역 사건의 전조였다. 한편 세자시강원 설서 홍국영은 벽파들의 끊임없는 모해와 자신의 라이벌 정후겸의 모해에도 꿋꿋하게 세손을 잘 보호 하였으며, 동시에 관직도 올라가 정 6품 세자시강원 사서에 승진 하였으며, 1774년의 세손의 승명대리 사건 당시 정후겸의 마지막 보루였던 벽파 집단 상소를 지혜 있게 잘 차단하여 영조의 눈으로부터 세손을 잘 지켜 냈다.

    1776년 영조의 건강이 나빠졌다. 정후겸을 비롯한 벽파세력은 급기야 영조가 선위교서를 내릴 때 상선내관을 매수하여 미리 이를 조작해 두었다가 공표하는 술수까지 대비해 두었다고 한다. 정후겸은 당시 이조 참판직에 올라 있었고, 그는 자신의 혁명적 야심을 이루기 위한 최후의 기회로 세손의 즉위만은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했다.

    마침내 1776년 영조가 승하했다. 홍국영은 세손을 지켜내 세손을 즉위시키는 데 성공한다. 결국 정후겸의 야심은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정후겸은 마시막 야심을 드러낸다. 그것에 표출되어 나타난 것이 1776년의 홍인한-김양로-정후겸-홍상간 모역 사건이다.

    정후겸의 사병을 바탕으로 궁궐에 급습하여 정조를 비롯한 시파 세력들을 죽이고, 은전군 찬을 보위에 앉힌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홍국영을 동부승지(정 3품)로 임명하였으며, 권력 기반에 올라선 홍국영은 이 사건을 조사하여 정후겸, 홍인한을 각각 함경도 삼수, 고금도에 위리안치 시키고, 김양로와 홍상간은 추국 후 참수하였다.

    홍국영, 정조 최대 정적이자 젊은 나이에 권력을 잡았던 정후겸. 그는 자신의 세상을 꿈꾸었으나 결국 1776년 정조의 명에 의해 사사당하고 만다. 역사 속에 너무 빨리 등장해 빨리 사라져간 정후겸은 이렇듯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다.

    이후 홍국영은 이조 참판, 대사헌 등 요직에 두루 올라 당대의 세도가로 명성을 날린다. 그러나 정조는 홍국영으로 하여금 일정 기간 세도를 쥐어준 뒤 자신의 구상에 맞는 세상을 하나하나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구상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 가던 1779년, 홍국영이 관련된 상계군의 옥이 발생한다. 홍국영이 자신의 누이를 후궁으로 올렸으나, 자식 없이 요절하자 대비책으로 등용한 상계군이 자신의 뜻에 맞지 않자 역모로 몰아 죽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 해 보면, 정조가 자신의 정계 구상이 마무리되자 홍국영을 축출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준비하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홍국영과 관련된 사건이 이 시점(1779~1780)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홍국영이 즉시 탄핵되었던 것이다.

    (3)사망

    홍국영은 이 사건 뒤 집중적인 탄핵을 받아, 마침내 탄핵이 받아들여져 강릉으로 축출된다. 홍국영은 억울함과 후회가 교차했을 것이다. 자신의 분신과 같았던 정조가 자신을 버렸다는 것이 홍국영에게는 매우 억울한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축출된 지 1년 만인 1781년, 급사하게 된다. 그의 나이 34세. 짧은 생을 마감한 그는 그 이후 조용히 역사 속에 묻힌다.

    홍국영은 오직 정조에 의존해 홀로 싸우다 간 비운의 권력자였다. 그에 대한 세도가적 인식만으로는 그를 이해하기에 부족하지 않나 싶다.

    출처: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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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정치가. 자는 덕로(德老). 본관은 풍산(豊山). 감사 창한(昌漢)의 손자, 판돈령(判敦寧) 낙춘(樂春)의 아들. 1772년(영조 48) 25세에 급제, 한림(翰林)에 들어가 춘방설서(春坊說書)를 겸하였다. 때에 권신 정후겸(鄭厚謙)ㆍ홍인한(洪麟漢) 등이 동궁 (東宮 : 왕세손, 뒤의 정조)을 위협하자 이를 막아 무사히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 공으로 정조의 총애를 입어 도승지(都承旨) 겸 금위 대장(禁衛大將)에 임명되어 모든 정사는 그를 거쳐 상주(上奏)하고 결재하는 권한을 위임받는 한편, 누이를 정조에게 바쳐 원빈(元嬪)을 삼게 하고 궁중에 있으면서 소위 세도 정치를 하였으니, 국가의 대신ㆍ원로(元老)들이나 서료(庶僚)들까지도 대궐에 들어가면 먼저 국영의 숙위소(宿衛所)에 들어가서 정치를 논의하는 등 국영의 위세는 왕을 모욕할 정도였다. 그러나 뒤에 정조는 여론의 귀추와 김종수(金鍾秀)의 진언을 받아들여 국영의 벼슬을 빼앗고 강릉(江陵)으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병사했다.

    출처 :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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