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당시의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다. ( 그림은 1957년 청강 김영기 화백이 그린 「고도의 인상」)
경주 시가지에는 다른 도시에서 볼 수 없는 둥글둥글한 작은 산 같은 등성이가 수두룩하니, 경주 사람들이 ‘봉황대’라고 불러오던 것이다. 이게 모두 신라 때, 왕이나 왕비, 왕족, 귀족들의 무덤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무덤은 죽은 이의 주검을 묻은 것이니, 예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게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무덤의 개념을 뛰어넘는 엄청난 크기의 더미가 있으니, 산더미인지 무덤인지 구분을 잘 못할 정도다.
명칭에 있어서 왕(王)과 왕비(王妃)의 무덤은 ‘릉(陵)’이라 하고,
그 외의 무덤은 ‘묘(墓)’라고 부르니,
예를들어 ‘태종무열왕릉’이나 ‘흥덕왕릉’, ‘김유신 장군 묘’나 ‘김인문 묘’라고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