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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11.21

숙종이 환국을 여러차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숙종은 정치세력을 한번에 뒤바꾸는 환국을 여러차례 실시하였는데요.

임금이 신하들 눈치를 본 사례들도 많은데 숙종은 어떻게 이렇게 환국을 할 수 있었던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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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숙종은 1680년 경신환국, 1689년 기사환국, 1694년 갑술환국을 통해 정국의 급속한 변화를 통해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숙종이 이렇게 환국 정치를 할 수 있었던 첫번째 배경은 숙종이 조선의 왕 가운데 드문 적장자 출신 국왕이었습니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27명의 왕 가운데 적장자 출신 임금은 문종·단종·연산군·인종·현종·숙종·경종 등 일곱 명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숙종과 왕위 계승 경쟁할 대군이 부재하였기에 출신의 우위에 있어 과감하게 환국을 할 수 있었습니다. 두번째로는 조선후기 제한된 정치와 경제적 이권과 다르게 이를 차지하고자 하는 붕당 세력의 확대로 경쟁이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로는 숙종의 통치 마인드입니다. 숙종은 의도적으로 편당적 붕당 운영을 통해 국왕권을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비록 숙종 때 스스로 탕평을 언급하기도 하였지만 실제로 시행하지는 않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신환국은 정치 권력의 기반인 병권을 장악하기 위한 남인의 움직임으로 시작, 이에 숙종은 권력을 늘려가던 남인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 허적의 서자 허견의 모반 사건을 명분으로 남인을 축출하고 공적이 있는 왕족인 훈척과 서인을 대거 등용합니다.

    경신환국 이후 정국은 훈적과 서인이 주도하는 모양새를 갖추나 곧 훈적이 악화되면서 서인만 남았고 숙종이 후궁이었던 장씨가 낳은 왕자를 원자로 삼으려 하자 장씨가 남인과 관련이 있다고 여긴 서인 모두가 이를 반대, 숙종은 훈척마저 약화된 정국에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원자 책봉을 반대한 거인을 일소하고 남인을 재등용하는데 이를 기사환국이라 합니다.

    기사환국 결과 남인과 장씨의 일가가 정국을 이끌게 되는데 숙종이 또 다른 후궁인 최씨를 총애하고 남인과 장씨 일가에 대한 고변이 이어지며 상황이 급변하기에 숙종은 비망기를 내려 남인 일파를 제거하고 서인을 등용, 기사환국 이후 왕비의 자리에 있던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 이를 갑술환국이라 합니다.

    숙종이 이렇게 할수 있던 배경은 무엇보다 강력한 정통성이 존재했기 때문으로 유교 국가 조선에선 군왕들에게도 정통성에 근거한 급 이 있었고 기본적으로 정실이 낳은 맏아들인 적장자 군왕이 첫 손에 꼽힙니다.

    그런데 숙종은 여기에 더해 적장자의 적장자였으니, 역대 조선의왕 그 누구도 범접할수 없는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환국은 기본적으로 복수의 붕당이 공존하면서 서로 대립하고 견제하는 가운데 균형을 이루고 있는 붕당정치의 역학구도를 바탕으로 하여 발생한 형태 입니다. 숙종 전반기의 갑인환국·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은 서인과 남인 사이에,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난 뒤의 경인환국·병신환국·신임환국·을사환국·정미환국은 서인에서 분립한 노론과 소론 사이에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의 지위가 서로 교체된 것이었는데 어느 붕당이 정국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면 그 붕당 구성원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났습니다. 횐국 때 마다 주요 관직을 상실하고 사형이나 유배 또는 문외출송 등 처벌을 받음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박탈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는 인원의 규모는 환국에 따라 서로 달랐는데 환국의 강도가 강한 경우에는 붕당 구성원 거의 모두가 관직을 잃고 주요 구성원 다수가 처벌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환국 정치로 붕당의 대립이 격렬해지면서 붕당 정치의 자기 조정 능력이 약화되었는데 이때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국왕의 의도에 따라 급격한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고 상대 당의 과도한 희생이라는 부작용 속에 이루어진 환국은 붕당 간의 견제와 공존이 가능했던 붕당 정치와 국왕 주도로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 정치 사이에 등장한 과도기적 정치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