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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줄나비104
슬기로운줄나비10423.07.30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난 원인이 일단 궁금합니다..

그리고 왕족을 살해하는걸 아무도 못막았다는게 이상해서 왜 그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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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키며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폐기하고 조선 정부에 친일 내각을 구성, 전쟁에서 북양군을 와해시킨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해 조선의 자주, 독립 및 요동반도와 타이완섬 할양, 전쟁배상금을 받아냅니다.

    그러자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요동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할 것을 요구 , 3개 열강의 압박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환합니다.

    그동안 러시아와 우호적인 외교를 해왔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할수 있을 것으로 보고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를 자주 불러 조-러 간의 공조를 논의합니다.

    이에 따라 친일 내각에 대한 축출을 단행, 일본 공사관 및 일본의 고문단의 지지를 받던 어윤중, 김윤식 등 친일 성향의 관료들이 고종과의 마찰, 박영효가 주도한 조의연 파면 등에 책임을 물어 축출되고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친러 성향의 관료들이 중용됩니다.

    그러자 친일 대신이었던 박영효는 명성황후가 자신의 숙청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후 명성황후 암살을 모의하지만 이후 을미사변에 가담하는 유길준의 내부고발로 인해 실패해 일본으로 도주하고 박영효가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 혐의로 수배되며 상당수 친일관료들이 중앙에서 쫓겨나게 되어 일본의 입지는 좁아지게 됩니다.

    망명한 박영효의 말에 따라 일본은 조-러 간의 비밀협약의혹을 신빙성 있게 여기고 이에 따라 일본의 향후 외교방침 전환을 위해 이토 내각과 정계, 육해군부 내에서 갑론을박이 오갔는데 이때 유신지사이자 당시 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오랜 정적이었던 다니 다테키의 추천을 받아 새로 조선공사로 부임한 퇴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가 조-일 외교의 전면에 등장, 배후로 추정되는 일본 당국 관계자들은 미우라로 하여금 명성황후를 시해함으로 국면을 전환하고자 합니다.

    조선 정부가 훈련대의 해산을 명령한 때는 10월 7일 새벽 2시, 이에 군부 대신 안경수가 9시 경 급히 이 사실을 미우라 고로에게 통보했고 뒤이어 우범선도 달려와 미우라에게 보고, 이에 미우라는 거사 날짜를 그날 밤으로 바꾸고 스기무라와 의논 후 오카모토 류노스케를 불렀으며 오카모토는 10월 6일 흥선대원군을 만난 후 일본으로 가는 척 하다 급히 서울로 돌아옵니다.

    미루나는 거사 계획서인 입궐방략서를 영사관보인 호리쿠치 구마이치에게 주고 용산으로 가 거사 준비를 지시, 이에 한성신보 직원들돠 낭인들은 칼 또는 총을 들고 용산으로 모였고 미우라는 오기하라 히데지로에게 영사관 순사들을 인솔해 사복에 칼을 차고 용산으로 가도록 지시, 아사야마로 하여금 군부 협판 이주회에게 사실을 알리도록 했고 이주회가 조선인 몇명을 규합해 공덕리로 가도록 합니다.

    그날밤 공덕리 대원군 별장에 모인 사람은 공사관 직원, 고문관, 순사, 기자 등 약 60여 명에 달했고 이들은 술에 취했고 복장도 제 멋대로 였습니다.

    대원군은 그들이 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으며, 일본인 순사들은 조선군으로 위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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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30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일 전쟁 중에 조선에서의 내정 개혁(갑오개혁)을 주도했던 일본의 이노우에 공사는 삼국 간섭에 의해 국제적으로 일본의 위상이 저하된 것을 계기로 조선에서의 주도권 행사가 여의치 않게 되었다. '300만 엔 차관' 제공 등의 회유책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하자 조선에서는 1895년 7월 이른바 친러파 정권이 성립되었다. 러시아가 일본과 본격적인 무력 충돌을 일으킬 의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일본은 조선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조선 주재 공사를 미우라 고로 육군 중장으로 교체하고 대원군을 이용해 친일파 정권을 부활시키기 위한 궁중 쿠데타를 획책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 한국 학계에서는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은 이노우에 공사가 주범이며, 단순하고 무지한 육군 군인인 미우라 신임 공사가 하수인인 것처럼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먼저 일본 정부의 지시 및 교사 여부는 아직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사건의 주범은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의 군인 및 외무성 경찰과 외교관, 우익인 현양사 계열의 조선 낭인을 모두 지휘할 수 있었던 인물인 미우라 고로라고 하는 점이다. 또, 시해 현장에서 직접 하수인으로 활약한 인물들은 지금까지의 통설대로 조선 낭인만이 아니라 일본군인 장교가 직접 개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서 일본의 우익 민간인들이 자행했다고 강변하고 있고, 또 이들이 이른바 한국 합병 후에 자신들의 공로를 과시하기 위해 저마다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을 너무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문제점도 있다.


    또 하나, 친일 정권 부활을 위한 궁중 쿠데타가 중요 과제였고, 이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조선 왕실, 특히 고종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는 방식으로 명성황후 시해라는 극단적인 수단이 채택되었다고 보이는데,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구체적인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관여한 인물 중에 후쿠자와의 영향을 입었던 국권파의 한 그룹인 '게이오(慶應) 출신' 우익의 움직임이 시해 사건 1년 전에 발생한 김옥균의 암살 사건과 묘하게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출처 : 일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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