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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긴까치115
잘생긴까치11523.08.29

홍범도 장군님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영상에서 홍범도 장군님을 보았습니다.

근데 영상에서는 홍범도 장군님의 업적이나 그때 당시에 활동을 세세히 알려주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홍범도 장군님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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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명 범도라고 하며 호는 여천, 186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자성에서 출생,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갑산으로 이사 후 수렵과 광산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이 해 9월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11월 차도선, 태양욱, 송상봉, 허근과 함께 산포대를 조직 후 삼수, 갑산 지방 포수들의 총포를 회수하러 온 일본군을 대적해 북청, 후치령을 중심으로 갑산, 삼수, 혜산, 풍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격파, 이 싸움에서 그는 9시간의 전투 끝에 적을 전멸시켰는데 한때 갑산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점령되자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전력, 다음 해 부하 박영신으로 하여금 함북 경원의 수비대를 습격하게 해 성과를 거두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약 400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 국내에 잠입, 갑산, 혜산, 자성 등의 일본군을 급습해 전과를 거두었는데 특히 만포진 전투에서 70여명을 사살했습니다.

    1920년 6월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제 19사단의 병력과 남양 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해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하자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해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 이 봉오동 전투는 그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으로 기록됩니다. 같은 해 10월 청산리 전투에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제 1연대장으로 참가해 공을 세웠고, 그 뒤 독립운동단체가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부총재가 됩니다.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해 스랍스케 부근에 주둔하나 같은 해 6월 소련 당국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령으로 빚어진 자유시사변으로 많은 독립군이 희생, 이후 홍범도는 남은 독립군 부대와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 레닌 정부의 협조로 설립된 고려혁명군관학교에서 혁명군 양성에 참여, 1922년 다시 연해주 이만으로 돌아왔고 1923~24년 무렵 그곳에서 집단 농장을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1937년 스탈린이 한인강제이주정책을 실시하면서 연해주의 한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홍범도는 카자흐스탄의 야니쿠르간 사나리크로 이주, 이듬해 크질오르다에 정착합니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 정부에 참전을 요청하나 고령을 이유로 거부, 카자흐스탄의 한글신문 레닌기치에 젊은이들의 참전을 촉구하는 기고문을 실었고 말년에 한인 극장인 고려극장에서 수위로 근무하는 등 조용한 여생을 보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여천 홍범도장군은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만주 대한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일본군을 급습하여 큰 전과를 이뤘습니다.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157명 사망 200여명 중상 100여명 경상자를 낸 반면 우리 피해는 4명의 사망자뿐일 정도로 대승을 거뒀습니다. 1868년 평안북도 자성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갑산으로 이사한 뒤 수럽과 광산노동으로 생활하였습니다. 1907년 전국 의병궐기대회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9월에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단속법을 공포하고 총기류를 빼앗으려하자 11월 차도선 태양욱 송상봉 허근 등과 함께 삼포대를 조직하여 삼수ㆍ갑산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러 온 일본군과 9시간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1910년 만주에서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으며 1919년 3.1만세 때는 독립군사령관이 되어 400명의 독립군을 이끌어 갑산 해산 자성 등에서 전과를 거두었고 특히 만포진에서 일본군 70여명을 사살하였습니다. 1921년 자유시참변으로 많은 독립군이 희생되었고 이후 이루크츠크로 이동하여 독립군양성에 주력했습니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중앙이시아로 이동하여 여러 곳을 전전하다 크질오르다에 정착하였고 1941년 제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소련이 참전을 요청했으나 고령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하고 고려극장 수위로 여생을 비교적 조용히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