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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01

영조의 탕평책이은 정확히 어떠한 정책이었나요?

영조는 오랫동안 왕을하며 수많은 정책들을 펼쳤던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중에서 탕평책이라는 정책은 정확히 어떠한 정책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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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7개의 답변이 있어요!
  • 든든한소쩍새224
    든든한소쩍새22423.05.01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조는 먼저, 붕당을 만드는 자는 영원히 정치에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히고, 노론의 장기 집권에서 오는 폐단을 막고자 노론의 강경파를 몰아 내고 소론과 남인의 온건파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펼쳐 나갔다. 그리고 영조는 탕평책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한양의 성균관에 붕당간의 다툼을 금하는 탕평비를 세웠다.

    -출처:우리역사넷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탕평책은 조선 후기 영, 정조대에 당쟁을 막기 위해 당파간의 정치세력에 균형을 꾀하려한 정책입니다.

    서로 다른 무리의 신하들이 골고루 벼슬할수 있도록 인재를 고르게 등용한 정책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緩論蕩平(완론탕평)

    → 緩 느릴 완 ; 論 말할 론 ; 蕩 쓸어버릴 탕 ; 平 평평할 평

    영조(英祖)의 탕평책(蕩平策)으로 붕당의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어느 당파든 과격한 인물을 배제하고 온건한 인물을 등용하여 극심한 정쟁과 옥사를 막고 붕당 간 타협을 통한 정국 안정을 도모한 온건 탕평

    ■ 峻論蕩平(준론탕평)

    → 峻 높을 준 ; 論 말할 론 ; 蕩 쓸어버릴 탕 ; 平 평평할 평

    정조(正祖)의 탕평책(蕩平策)으로 영조 재위시 완론탕평에 참여한 관료들이 탕평의 근본을 부정했다며 비판한 청류 및 남인 계열 인물을 등용하고 임금과 신하 간 의리를 중시하며 당파의 옳고 그름을 명백히 가리려 한 적극 탕평

    붕당 간의 다툼을 완화시키고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탕평책이 시행되었으나 오히려 붕당 정치를 회복 불능 상태로 빠트리고 세도정치가 등장하게 된 원인이 되었기에 그렇습니다.

    즉,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조의 탕평책은 원래 붕당을 없애는 데 뜻이 있었지만 당장 완성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당파든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많이 등용하여 왕권에 순종시키는데 주력하게 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시파와 벽파로 나뉘어 있었던 정국의 분열은 줄어 들고 왕권이 강화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정책은 조선사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정책 중 하나입니다.

    다음의 내용이 존재합니다.

    탕평 정치는 영조 때 자리잡았다.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아울러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다. 그러나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이후 정조대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40_0040_0030_0030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조가 초기에 시도한 탕평책도 숙종 때와 별로 다름이 없었습니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탕평의 교서를 발표하여 정국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영조 스스로가 소론을 내몰고 노론을 중용하다가, 곧이어 노론을 내몰고 소론을 기용하는 등 편당적인 조처를 취해 정국의 불안만을 조성하였습니다. 붕당의 세력이 비대해진 정국에서, 기반이 약화된 왕권으로 정국의 수습을 모색하기에는 역시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탕평책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게 된 것은 왕권이 안정되면서부터였습니다. 영조는 붕당 사이의 균형 관계를 조성할 수 있는 힘은 왕권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영조는, 노론과 소론을 조정하면서 일련의 군제 개혁과 경제 개혁을 단행하여 왕권의 기반을 구축하여 갔습니다. 나아가, 영조는 그를 지지하는 새로운 세력 집단인 이른바 탕평파(蕩平派)를 육성, 그들로 하여금 정국을 주도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치열하던 정쟁은 어느 정도 억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이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으며,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간의 치열한 다툼을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습다. 실제적으로도 붕당 간에 완전한 균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즉, 탕평의 원리에 의해 노론과 소론이 공존해 있었으나, 소론의 강경파에 의해 이인좌의 난과 나주 괘서 사건이 일어나면서, 소론은 점차 입장이 약화되고 노론의 우세가 두드러져 갔습니다. 사도 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그 후에는 거의 절대적으로 노론이 우세하였습니다.

    정국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붕당의 근거지인 서원의 난립이 금지되었고, 균역법이 시행되어 군역의 폐단이 완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문고 제도가 부활되었으며, 속오례의, 속대전, 무원록 등이 편찬되어 흐트러진 문물이 재정비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영조 가 당파 싸움 을 막기 위해 당파간의 세력 균형을 위해 추진한 정책이다. 이러한 정책은 후대인 정조 대에도 이어졌다. 즉 노론 소론 등등 서로 무리지음이 없으면 왕도가 탕탕 하다라는 의미로 붕당을 지어서 정치를 못하게 하고 이를 어길시에는 그 직책에서 물러나게 함으로써 왕권으로서 신하들의 정당정치를 방지 하고자 하는 정책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