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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철한불독44
냉철한불독4423.06.19

고구려에서 발견된 벽화를 통해 알 수 있는 당시의 생활모습은 어떤 것인가요?

고구려에서 발견된 동굴이나 무덤에는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요. 사람들, 동물그림을 통해 알 수 있는 당시의 생활모습은 어떤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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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생활 풍속은 죽은 자 생전의 공적생활 가운데 기념할 만한 것과 사적생활의 풍요로움을 무덤 안에 그림으로써 내세에도 이와 같은 삶이 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택해진 벽화 주제입니다.

    때문에 생활 풍속을 주제로 한 고분 벽화에서는 묘 주인이 홀로, 혹은 부인과 함께 앞방의 곁방 안벽이나 널방 안벽에 정좌한 채 남녀 시종들의 시중을 받는 장면, 대행렬에 둘러싸여 출행하는 장면, 산야를 질주하며 사냥하는 장면, 연회를 베풀고 노래와 춤, 곡예를 즐기는 장면 등이 자주 나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고구려의 요동 진출 및 낙랑 멸망 뒤의 평양 진출에 의한 중국계 벽화 석실 고분(壁畫石室古墳)과의 접촉을 통하여 4세기 중엽경부터 시작되었다.


    안악 지방(安岳地方)에 있는 동수묘(冬壽墓, 일명 안악3호분)는 귀화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동수의 무덤이다. 고구려 벽화 고분의 직접적 모형이 된 가장 확실한 예의 하나이다.


    이 무덤은 좌우 측실(側室)이 달린 전실(前室)과 후실(後室)로 구성되는 고구려 쌍실묘(雙室墓)의 기본 구조, 말각조정(抹角藻井)의 천장 그리고 벽화의 기본 특색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동수묘의 벽화는 전실의 측실에 주인 내외의 좌상과 주방·마구간·위병(衛兵)이, 후실의 회랑벽에 긴 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필선에는 태세(太細)가 있고 대상이 서로 겹쳐 공간의 깊이가 표현되어 있는 것이 중국 화법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중국 양식의 벽화를 가진 무덤으로는 덕흥리고분(德興里古墳, 408년)·감신총(龕神塚)·수산리고분(修山里古墳)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전기 고분이면서 매산리사신총(梅山里四神塚, 일명 수렵총)의 벽화에서는 그것이 단실묘(單室墓)인 까닭도 있지만 주인 부부 좌상은 현실 북벽에 크게 그려졌다.


    엄격한 정면관(正面觀 : 옆에서 바라본 모습), 인물의 분리 병치(分離倂置, juxtaposition), 충분한 배경 공간, 태세가 없는 필선 등 구도와 화법에서 고구려의 개성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러한 고구려 양식은 쌍영총(雙楹塚)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여기에서는 필선에 힘이 있고 인물들이 서로 머리를 돌려 시선을 교환하고 있어 동작감이 표현되는 진보를 보이고 있다.


    전기 벽화의 특징적 무늬로는 중국 한대의 괴운문(怪雲文)에서 출발한 구름띠무늬가 있다. 이들 벽화는 프레스코법으로 그려졌으며, 물감으로는 녹청(綠靑)·군청(群靑)·황토·주토(朱土)와 먹이 쓰이고 있다.

    통구 지방(通溝地方)의 고분에서는 인물화·생활화의 전통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연꽃·동심원(同心圓) 같은 무늬를 벽에 산개(散開)하는 새 형식도 생겼다.


    평양 지방에서는 사신도(四神圖)가 벽면 전부를 차지하는 사신 벽화가 나타나서 차츰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인물화 벽화에 있어서도 전기의 정좌한 좌상이 아니고 어떠한 생활 장면의 주인공으로 표현된 풍속도 벽화로 바뀐다.


    무용총(舞踊塚)·각저총(角抵塚)은 중기 풍속화 고분의 대표적인 예이다. 무늬 벽화 고분으로는 환문총(環文塚)·귀갑총(龜甲塚)·산연화총(散蓮花塚)·강서대묘(江西大墓)·강서중묘(江西中墓)·노산리개마총(魯山里鎧馬塚)·고산리1호분(高山里一號墳) 등이 있다.


    무용총의 벽화는 화면의 정지감(靜止感), 색조의 안정감, 대상물의 병치 등 고구려 벽화의 특색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수렵도는 그 구도가 기본적으로 중국 한대 수렵도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화면이 크게 정리되어 공간이 많고 힘이 있으면서 고구려 벽화 특유의 정지감이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전기의 매산리사신총 벽화에 비하면 선이 살아 있고 인물의 경직이 풀려서 화법상의 발전이 뚜렷하다. 다만 나뭇잎은 밥주걱처럼 표현되어 있으며 후기의 사실적인 나무 그림과는 쉽게 구별되는 편년상의 한 기준이 된다.


    사신도는 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이 주벽(主壁)의 주제로 등장하는 것은 중기에 들어서이다. 가장 빠른 예가 개마총이고 강서중묘를 거쳐 강서대묘의 그림으로 발전한 것 같다.


    강서중묘의 사신도는 사실(寫實)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동작 형태의 기본 선이 만들어 내는 생동감과 색채에 의한 몰골법(沒骨法) 같은 표현이 그림에 정신적인 깊이를 주고 있다. 그 몽환적(夢幻的)인 성격이 무덤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묘에서는 전기에 유행하던 괴운문이 인동당초(忍冬唐草) 띠무늬로 바뀌고 있다. 그 힘에 넘치는 필치와 살아 있는 색감은 새로운 후기 양식으로의 이행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나무와 산의 묘사도 6세기 중국 회화에서 보는 따위의 사실적인 것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중기 벽화는 전기의 벽화에서 독립한 완전히 고구려화된 양식이다. 주제에 있어서는 인물화에서 사신도로 이행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화법에서는 중기 양식에서 후기 양식으로 이행이 진행된 시기였다. 인동당초띠무늬가 특징적인 무늬로 등장하였다.

    후기에는 풍속도·무늬 그림은 완전히 사라지고 화려한 채색의 사신도 일색이 되었다. 벽면은 사신 이외에 비운문(飛雲文), 날개 달린 연꽃, 인동무늬들이 전체 공간을 메우다시피 하였다. 그리고 나무·산·바위 등이 사실적으로 되었다. 중국 육조시대 회화의 새로운 영향이 뚜렷하다.


    필치에 힘이 생기고 그것이 화려한 빛깔과 함께 벽화 전체에 뛰는 듯한 율동감을 주고 있다. 연도(羨道) 벽에 신장(神將)이나 짐승을 그려서 수문(守門)의 임무를 맡게 하는 형식도 보인다. 즉, 영주 순흥리고분(順興里古墳) 벽화의 신장도의 유래를 보여 주고 있다.


    인동당초띠무늬는 중기에 이어 계속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채색이 입체감의 효과를 내어 발전하고 있다. 통구사신총에서는 유래를 알 수 없는 괴상한 짐승들이 기둥을 대신하여 방 네 귀에 선 채로 그려져 있다.


    그것이 전기나 중기 양식과는 다른, 후기 양식을 더욱 특이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전형적인 후기 벽화 고분으로는 진파리1호분(眞坡里一號墳)·통구사신총·내리1호분(內里一號墳)·통구4호분·통구5호분 등이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고구려 고분 벽화를 통관해 보면, 중국 미술의 영향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면서도 화법이나 구도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고구려계 양식을 확립하였다. 무용도·수렵도 등 벽화 주제의 배치나 내용 면에서 개성 있는 독창성을 보여 주고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고분을 현세 공간의 연장이면서 고인(故人)의 혼전(魂殿)임을 강조하여 묘주의 초상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 시설을 재현하는 방침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가호(加護)를 받기 위한 정토적(淨土的) 성격을 띠기 위하여 상징적인 무늬로 벽면을 채우기도 하였다. 연화무늬·사신도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고구려 고분 벽화는 처음에는 고분 벽화로 출발하여 그 임무와 기능에 충실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차츰 회화 자체가 가지는 순수 미술로서의 성격과 효과에도 관심을 가진 듯한 느낌이 든다.


    통구사신총의 경우 그것은 고분 벽화라기보다는 궁전 벽화라고 해도 좋을 만한 현세적인 힘과 미(美)와 생명감에 넘치고 있다.


    마지막으로, 고구려의 벽화는 발전과 변화가 있을 뿐 퇴화 현상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 벽화는 고졸(古拙)→숙달→절정기→퇴화→소멸이라는 미술 양식의 변천과정 중 고졸에서 절정기까지 뿐이고 거기에서 갑자기 끊기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 벽화는 아직 더 끌어갈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라가 멸망함에 따라 같이 급사(急死)한 미술 분야였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