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신문역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우리나라에 최초에 신문은 누구에 의해서 발행되었으며, 현재의 신문 형태로 자리잡은때는 언제인지 광고는 언제부터 도입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인쇄된 근대신문이 발간되기 이전부터 필사신문의 일종으로 관보의 성격을 띤 ≪조보 朝報≫가 있었다. 그러나 전근대적 신문형태인 조보는 근대신문의 생성에 밑거름이 되기는 하였지만 근대신문으로 직접 성장,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근대신문은 서양과 일본의 것을 본떠 1883년(고종 20) 발간한 ≪한성순보 漢城旬報≫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근대적 신문시대는 바로 ≪한성순보≫를 기점으로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의 신문의 발달은 시대적으로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즉 개화기·일제강점기·광복 이후 등으로 개화기는 다시 이식기, 생장기, 투쟁기로 나누어지고, 일제강점기는 암흑기, 재생·수난기, 소멸기로, 광복 이후시대는 혼란기, 정착기, 자유기, 정비·확장기, 자율경쟁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문 [新聞]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울신문 역사
1. 대한매일신보 시대
1904년 7월 18일에 창간된 대한제국 시대의 신문이다.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이 양기탁 등 민족계몽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지원을 받아 세웠다.
2. 매일신보 시대[
1910년 8월 30일부터 1945년 11월까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존재했던 시대
3. 서울신문시대
8.15 광복 후 한동안 좌익계열의 사원자치위원회가 운영하다가 미군정과 갈등을 빚어 1945년 11월 10일 군정 당국이 정간처분을 내렸다. 정간크리와 함께 '매일신보' 제호는 없어지게 되었고, 위창 오세창 사장, 하경덕 부사장, 성재 이관구(1898~1991) 주필, 홍기문(1903~1992) 편집국장[2] 등의 경영진과 필진을 새로 구성하여 '서울신문'이란 이름으로 변경해 1945년 11월 23일자 석간부터 속간하였다. 지령은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를 모두 계승하여 1만 3738호로 발행하였다.
이후 여러 번 기사내용을 시비로 공보처의 간섭과 감독을 받게 되어 1950년대에는 이승만 정권의 어용신문으로서 자유당을 적극적으로 후빨지지하다가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시위대들이 사옥과 시설을 홀랑 불태워 버려 수많은 희귀 자료들이 손실되었고, 이승만 퇴진 이후 허정 과도정권기 들어 한국일보 출신인 석천 오종식(1906~1976)이 사장직에 부임했으나, 당연하게도 이후 독자층이 대거 이탈하면서 재정난 크리에 빠져 1961년 5월 9일 휴간되었다. 5.16이 일어난 후인 12월 22일에 주 36면 석간 단간제로 다시 속간되었고 독재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나팔수 노릇을 계속했다. 매일신보 시절에 버금가는 흑역사 시절. 참고로 이 시기인 1959년 3월 23일부터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 시기의 지령을 폐기하고 '서울신문' 제호로 창간한 시점부터의 지령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앞선 두 신문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한겨레보다 앞서 한글전용을 실행한 전력이 있다. 1958년과 1968년에 한글전용판을 발행하였지만 호응이 시원치 않아서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국한문혼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신문 발행에 있어서 글자배열이나 편집체제, 문장 등을 한글판에 맞도록 연구하는 등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20년 후 창간하는 한겨레의 한글전용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셈.
또 1983년부터 국내 일간신문 최초로[3] 신문 제작방식의 주류인 납활자판을 버리고 컴퓨터 제작 시스템(CTS, 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을 도입하여 프레스센터 준공 후인 1985년 신정부터 실시해 타 언론사보다 먼저 신문제작의 전산화를 꾀하였다. 이를 1988년 한겨레신문, 국민일보, 1989년 세계일보, 1992년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1993년 한국일보, 1994년 동아일보가 뒤따르게 되었다.
4. 민주화 이후 현황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 노동자 대투쟁은 서울신문의 역사를 전환케 했다. 1988년 4월에 권영길 외신부장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1989년 9월 사원지주제, 사후평가제, 제작 3개 국장 임명동의제 관철 등을 목표로 26일간 파업을 벌여 부분적으로 관철시켰다. 1995년에는 '서울신문 뉴스넷'이란 이름으로 인터넷신문 서비스를 개시하고 1996년부터 가로쓰기로 바꾸었다. 1997년에는 세계 최초로 구동축이 없는 '타워형 샤프트리스 윤전기'를 도입해 가동시키고 전면컬러 제작이 가능한 '5세대 CTS'를 가동시켰다.
위와 같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집권 이전에는 친정부 언론의 대표주자였다. 군사독재정부 시절 중앙일간지 가운데서는 친정부 성향으로는 경향신문과 쌍벽을 이루었으며 1990년 경향신문이 한화그룹에 인수된 이후에는 지존의 자리를 차지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편파보도로 까였던 조선일보를 이 점에서는 안드로메다급으로 능가했고, 1992년 대선 당시 송정숙[4] 논설위원이 쓴 논설은 노골적인 YS찬양때문에, "YS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라고 친여적인 자사의 기자들에게도 까였을 정도.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도 저런식의 보도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DJ당선 후에 사장을 비롯해 경영진, 편집국이 대폭 물갈이되면서 그 편파성이 1998년 이전보다는 훨씬 완화되었고 제법 공정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면도 있다. 더 나아가 주필제를 2년만에 부활시켜 진보 역사학자 김삼웅을 주필직에 앉혔다.
그리고 1998년 11월 6일에 <서울신문 영욕의 53년 나래 접으며>라는 제목으로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는 칼럼을 실은 뒤 동월 10일자부터 제호를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을 자처하는 의미에서 사명은 '(주)대한매일신보사', 제호는 '대한매일'로 각각 변경하고 도메인도 'www.kdaily.com'으로 바꾸면서 매일신보 기간을 제외한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을 합산하기 시작했고[5], 이후 한겨레, 경향신문과 함께 조중동에 맞서는 진보신문 트로이카 '한경대'로 불리기도 했다.
1999년에는 스포츠서울 부문을 '스포츠서울21(주)'로 독립시켰고, 2000년부터 편집국장 선출방식을 직선제로 바꾸고 2002년부터 본사 사원들로 구성된 우리사주조합이 지분을 인수해 대주주가 되어 사장 선출방식을 공모제로 바꾸었다. 2004년 1월 1일을 기해 다시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환원했지만 지령은 대한매일신보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계산하고 있다.
2009년 이동화 사장 취임 이후 편집국장 선출방식이 9년만에 임명동의제로 바뀌면서 논조가 예전의 관보 수준으로 후퇴할까 싶었지만, 정부 비판 기사가 나오는 등 나름 독립적인 색채를 유지하려고 노력중이다.
2017년부터 이덕일에게 연재 지면을 주면서 논란이 되고 있기도 하다. 이덕일은 해당 지면에서 최소한의 사료 검증도 안된 자신의 망상을 마음껏 펼치고 있는 중(...).
2018년 7월부터는 토요일자 신문을 발행하지 않는다. 주52시간 노동시간 단축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 종합일간지 신문사중 최초로 주 5일 발행을 하게 되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 근대신문의 효시는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지인 독립 신문 입니다. 우리나라에 첫 광고는 1886년이었습니다. 주간신문인 <한성주보>에서 1886년 2월 22일자에 실렸던 광고가 우리나라 첫 신문광고였는데 요즘 광고와 달리 한자 24줄로 이뤄진 이 광고는 당시 독일 함부르크에 본사를 둔 무역회사 ‘세창양행’의 광고였습니다. 내용은 세창 양행에서 사고파는 물품에 대해 나열한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광고라는 단어가 없어서 ‘고백(告白)’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종 때에 이르서야 박문국이라는 관청에서 발행한 한성순보가 발행된 것이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의미의 신문이다.
이후 구한말에는 독립신문, 매일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의 황성신문등 꽤 많은 언론사가 난립했다.
이후 언론사의 전개는 각각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등 해당 신문 문서를 참고할 것.
1957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지 독립신문 창간 61주년을 맞아 신문의 날이 제정되었다.
-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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