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근대화가 늦어진 원인은 쇄국 정책이 맞는 건지요?
학생 시절 근대화가 늦어진 원인 중 하나가 쇄국정책이라고 배웠던 것 같습니다. 단어만 기억나고 세부내용 등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요, 근대화 지연 이유에 대하여 쇄국정책을 포함하여 간단히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원군의 통상수교 정책은 서양 열강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으나 변화하는 세계 정세에 주체적으로 대응하지는 못한 한계점이 있습니다.
신미양요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는 승리일수 있으나 군사적으로는 참패한 전쟁이었고 1866년 만든 척화비를 1871년 전국적으로 세운 것은 위기의식을 발로였으며 병인양요에서 승리하여 어느정도 자신감을 가질수 있엇으나 신미양요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으로 신미양요 이후 오경석 등의 개항가가 출현하는 이유가 이때문입니다.
또 대원군은 서양의 침략을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활용, 화이관에 입각한 강경한 배외적 태도를 휘하나 이는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세계 정세에 개한 객관적 인식을 어렵게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집권하였고(대원위) 이 과정에서 강력한 쇄국정책을 펵 조선의 근대화를 지연시킨 것이 맞으며, 이로 인해 조선은 글로벌 감각이 떨어져 소위 '불평등 조약'을 서구 열강들과 많이 체결하였으며, 이로 인해 일제에 합병되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이 실시한 대외 정책. 흥선 대원군은 실학 사상 중 토지 개혁을 통한 민생 안정과 부국 강병을 추구하는 중농 사상의 영향을 받아 청을 제외한 일본 및 서양 세력과는 통상하지 않는 쇄국 정책을 실시하였다. 러시아의 통상 요구를 프랑스를 이용하여 막으려 하였으나 거절당하자 1866년 병인박해를 일으켰다. 쇄국 정책은 1868년 오페르트 도굴 사건(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한 사건) 이후 절정에 달하며, 1871년 신미양요(미국이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 후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쇄국의 의지를 더욱 다졌다. 쇄국 정책은 애국심을 키워 주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걸림돌이 되었다. 1873년 흥선 대원군이 권력에서 물러나자 조선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하였다.
출처 :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쇄국정책은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문을 굳게 닫아 외국인의 출입과 무역을 통제하는 정책입니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쇄국정책을 고수하며 중국, 일본과만 외교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거 자체는 쇄국때문에 늦어진것 같습니다. 근데 이걸로 갑론을박이 있습니다. 외국 문물을 받아들여지는게 느려져서 기술같은것들을 늦게 접해서 다른 나라보다 늦어져서 발전에 손해를 봤다고 하기도 하고, 오히려 쇄국을 통해 정체성을 어느정도 정비하고 받아들어져서 우리나라 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도 합니다. 저는 결과론적으로는 늦어진게 맞지 않나 생각은 합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잘한것은 세도정치(지들끼리 다 해쳐먹는 기득권을 타파하고 민생을 돌본것)
그러나 쇄국정책은 근시안적 정책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늦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