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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그렇구나생각하면 아하!!23.11.13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편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현대까지 전하는 역사서중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는 어떠한 이유때문에 편찬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김부식이 편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편찬을 하게 되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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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사기는 실물이 현존하는 가장오래된 역사서입니다.

    삼국사기 가 편찬된 사실은 『고려사』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를 집필할때, 김부식의 나이는 71세 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삼국의 역사를 편찬하는 큰 사업을 벌였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가 지은 「삼국사기를 올리는 표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글에서 김부식은 인종이 어떠한 동기와 목표를 가지고 편찬을 지시했는지에 대해 인종의 말을 인용해 두었습니다

    “오늘날의 학사(學士)와 대부(大夫) 가운데에는 오경(五經)이나 제자(諸子)의 서적과 진(秦)·한(漢)의 역대 역사에 대해서는 간혹 두루 통달하여 상세히 말하는 자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서는 도리어 아득하여 그 시말을 알지 못하니, 매우 한탄스럽다. 게다가 생각하건대, 신라씨·고구려씨·백제씨는 나라를 세우고 솥발처럼 대립하면서 능히 예(禮)로써 중국과 통하였다. 그런 까닭에 범엽(范曄)의 『한서(漢書)』나 송기(宋祁)의 『당서(唐書)』에는 모두 열전(列傳)을 두었으나, 국내의 일은 상세하지만, 국외의 일은 간략하여 갖추어 싣지 않았다. 또한 그 고기(古記)라고 하는 것은 글이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事跡)에 빠진 것이 있다. 이런 까닭에 군후(君后)의 선악과 신자(臣子)의 충사(忠邪), 국가의 안위(安危)와 인민의 치란(治亂)을 모두 드러내어 경계로 삼을 수 없다. 마땅히 삼장(三長)의 인재를 얻어 일가(一家)의 역사를 이루어서 만세에 물려주어 일성(日星)과 같이 빛나게 해야 할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 땅의 역사를 후세에 물려주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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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인 1145년(인종 23년) 묘청의 난이 평정되어 서경파가 몰락하고 김부식을 필두로 한 개경파가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고려 인종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평정되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고 고려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김부식에게 명하여 역사를 기록하는 사서를 편찬하도록 하였습니다.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서 정사로 사료가 가치가 매우 큽니다. 이전의 기록들은 391회나 되는 외적의 침략으로 대부분 소실되거나 약탈당해서 존재여부를 알 수 없기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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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사기가 편찬된 사실은 고려사 에 기재되어있으며 1145년 12월 김부식이 찬술한 삼국사를 바쳤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에 인종은 김부식의 집으로 사자를 보내 치하하고 화주를 하사했습니다.

    당시 김부식은 71세 고령으로 정치력 , 문장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원로 대신인데, 그가 삼국의 역사를 편찬한 이유는 그가 지은 삼국사기를 올리는 표문에 나와있습니다. 이 글에서 김부식은 인종이 어떠한 동기와 목표를 가지고 편찬을 지시했는지에 대해 인종의 말을 모두 인용했습니다.

    - 오늘날의 학사와 대부 가운데에는 오경이나 제자의 서적과 진, 한의 역대 역사에 대해서는 간혹 통달하여 상세히 말하는 자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서는 도리어 아득하며 그 시말을 알지 못하니, 매우 한탄스럽다. 게다가 생각하건데, 신라씨, 고구려씨, 백제씨는 나라를 세우고 솔밭처럼 대립하면서 능히 예로써 중국과 통일하였다. 그런 까닭에 범엽의 한서 나 송기의 당서에는 모두 열전을 두었으나, 국내의 일은 상세하지만 국외의 일은 간략하여 갖추어 싣지 않았다. 또한 그 고기라고 하는 것은 글이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에 빠진 것이 있다. 이런 까닭에 군후의 선악과 신자의 충사, 국가의 안위와 인민의 치란을 모두 드러내어 경계로 삼을 수 없다. 마땅히 삼장의 인재를 얻어 일가의 역사를 이루어서 만세에 물려주어 일성과 같이 빛나게 해야 할 것이다.

    즉, 인종은 당시 최고 엘리트들조차 경전이나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있으면서 정작 이 땅의 지난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현실에 한탄, 인종은 중국에 전해지는 기록은 소략하며 고려에 전해지는 기록도 부실하고 거칠다는데서 그 이유를 찾으며, 현재에 부합하는 새롭고 유용한 역사서를 편찬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인종은 즉위 이래 국내외적으로 여러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야 했는데 여진의 금이 새로운 강자로 대두하여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크게 변했고, 고려는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으며, 국내에서도 여러 정치 세력간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와 결부되어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이 벌어지니 인종은 지난 시대의 역사를 제대로 수집 정리 해 여기에서 정치에 활용할수있는 역사적 교훈을 찾고자 했으며, 이에 당대의 최고 학식과 문장력을 가지고 정치적 식견이 풍부했던 원로 대신 김부식에게 편찬을 맡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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