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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호저172
까칠한호저17223.03.19

카사노의 굴욕 사건은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인가요?

학창시절에 역사를 배울 때 카사노의 굴욕 사건에 관한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밖에서 빌고 있는 그림이었는데 어째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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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8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카사노의 굴육사건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인 카사노에서 발생한 범죄 사건입니다. 1978년 8월 4일, 굴육사(신부)인 레오니드라(Leonarda)가 한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색 중에 여성의 뼈와 두개골, 손가락 등이 발견되었고, 레오니드라는 이들을 사용하여 육포를 만들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습니다. 이후 수사가 전개되면서, 레오니드라는 다른 여성의 살해와 육포 제조, 육포 판매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레오니드라는 이들 범죄를 자백하였으며, 그녀의 범죄가 신앙적인 이유로 이끌어진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저지른 범죄였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 사건은 이탈리아에서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미디어와 문화적인 영향력 등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이탈리아 천주교에 대한 비판과 믿음의 위축 등을 일으켰고, 이후 이탈리아 사회에서 대규모로 이루어진 범죄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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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카사노의 굴욕은 성직자 임명권을 놓고 세속군주와 교황간의 싸움이 배경으로 작용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간의 다툼이죠. 그 결과는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에서 3일낮과 3일밤 동안 용서를 빌어 그레고리우스 7세가 용서한 일화를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합니다. 결극 교황권이 세속군주 위에 있다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보름스 협약으로 성직자 임명권이 교황에게 있다는 결론이 났으며 교황권은 계속 커져 십자군 전쟁의 기수를 올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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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카노사의 굴욕(Road to Canossa, Walk to Canossa, Humiliation of Canossa)은 1077년 1월 25일,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알프스 너머 에밀리아 로마냐에 있는 카노사 요새의 문에 도착하여 속죄를 선언하고 이전에 하인리히를 교회에서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용서를 맹세했습니다. Henry의 참회 행위는 "Walk to Canossa"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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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세유럽의 기독교는 봉건사회와 손을 잡고 세력을 키워 나가며 결국 서유럽에서 정신적으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이와 함께 교회는 많은 땅과 재물을 헌납받아 넓은 영토를 가진 봉건 영주가 됩니다.

    교회가 사회의 권력과 손을 잡고 세력을 강화하면서 경제적으로 부유해지자 교회 성직자 중 타락하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고, 성직을 팔고사는 일까지 유행하게 됩니다.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교회가 타락하여 성직자 선출에 부정이 행해지고, 교회 재산을 몰래 빼돌리는 등의 죄가 있었으며 사태가 이렇게 되자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여 이와 같은 부패를 뿌리 뽑고 올바른 신앙을 되찾으면서 교회를 새롭게 하자는 개혁운동이 발발합니다.

    그러자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개혁을 반대하고 이에 화가 치민 교황은 기독교인들에게 황제를 만나지 말라고 명하고 하인리히의 신하들은 교황의 명령에 따라 황제를 무시하게되고 황제의 반대파 제후들은 황제를 파문시키고 만약 1년안에 파문에서 물러나지 못할때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하겠다고 뜻을 모으게 되자 황제는 어쩔수 없이 교황에게 무릎꿇게되고 3일 낮과 3일 밤 동안 찬바람을 맞으며 용서를 빌게 되는데 이것이 카노사의 굴욕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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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카사노의 굴욕 사건은 1857년 일어난 일본의 사건으로, 미국의 군함인 블랙샹크호가 코쿠리섬(珂児島)에 들어와 물자 수급을 요구했으나, 당시 쇼군 정부가 대외관계를 규제하고 있어 물자를 공급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화를 내던 미국인들은 코쿠리섬의 카사노(葛山) 마을 주민들에게 폭행을 가하고, 여성들까지 성폭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에서 대외적인 열강의 침략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키며, 당시 일본에서 대외 교류와 무역을 규제하고 있던 쇼군 체제에 대한 불만과, 미국과 같은 서양 국가에 대한 적대심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은 뒤이어 아이노 대첩과 함께 일본의 국력 증강과 군비 확충 등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의 근대화와 대외 개방에 큰 역할을 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림으로 보여지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의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로, 당시 일본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실감을 공감할 수 있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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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마도 카사노가 아니라 카노사가 아닐가 생각해 봅니다.

    카노사의 굴욕(Road to Canossa, Walk to Canossa, Humiliation of Canossa)은 1077년 1월 28일,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용서를 구한 사건을 말한다. 교회의 성직자 임명권인 서임권을 둘러싸고 독일왕과 교황이 서로 대립하던 중에 발생하였다. 교황권력이 황제권력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 전환기에 벌어진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하인리히 4세는 굴욕을 맛보았으나 독일에서의 권력 장악에 성공한 후 1084년 로마를 탈환하여 교황을 폐위하며 복수를 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로마를 떠나 이듬해 망명지에서 쓸쓸히 객사하였다. 카노사 굴욕을 세속 군주가 굴욕을 맛본 대표적인 사건이라 한다면 14세기 초에 있었던 '아나니 사건'은 교황이 겪은 치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303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교황별궁이 있는 아나니에서 생포된 후 로마 귀족가문 출신 '시아라 콜로나'[1]에게 빰을 맞았고 그 충격으로 인해 한 달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B9%B4%EB%85%B8%EC%82%AC%EC%9D%98_%EA%B5%B4%EC%9A%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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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카사노의 굴욕 사건은 1853년 미국의 페리호가 일본에 도착한 직후에 일어난 사건으로, 당시 일본은 고립되어 있던 나라였습니다. 일본의 고립은 일본 내부에서도 분쟁과 갈등을 유발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카사노는 일본 내부의 개혁을 주장하며 자신의 주장을 페리에게 전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힘은 상징적인 대표자인 황제와 사무라이들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주장은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에 카사노는 페리와의 협상을 위해 외국어를 배우고, 그를 도와 일본 내부의 개혁을 주장하는 단체를 결성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이 도쿄와 사무라이들의 눈에 거슬리게 되면서, 카사노는 체포되고 괴롭힘을 받으며 굴욕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내부의 분쟁과 갈등, 외국과의 접촉에서 오는 불안정성 등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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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카노사의 굴욕(Road to Canossa, Walk to Canossa, Humiliation of Canossa)은 1077년 1월 28일,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용서를 구한

    사건을 말한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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