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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26

최무선이 처음 만든 신무기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최무선이 처음 만든 신무기가 있는데 이것이 실제 사용이 되었나요?

사용이 되었다면, 언제 어떠한 전쟁에서 사용되었는지 , 효과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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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1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왜구 격퇴의 신무기 화약 개발


    최무선의 화약 개발은 어릴 적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최무선의 아버지는 고려의 곡식을 운반하는 역할을 맡은 광흥창 관리였다. 그 당시 고려는 왜적들이 쌀을 약탈하는 일이 빈번하였고 아버지 곁에 있던 최무선은 왜구를 물리칠 방법을 생각했다. 우연히 화약의 위력을 알게 된 최무선은 화약 개발에 착수했다. 주요 성분인 염초(焰硝) 개발에서 난관을 겪었지만, 중국에서 온 상인 이원(李元)이 최무선의 열정에 감동하여 기술을 전수했다. 최무선은 화약 제조가 가능해지자 화약을 개발하는 기관을 만들 것을 고려에 요청하여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했다.


    왜선 500척 괴멸시킨 진포대첩 이끌어


    국력이 강했던 고려는 몽골에 항복한 뒤 군사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그 결과 왜적의 침략이 전국으로 이어졌고 침략 규모도 훗날 수도까지 위태롭게 할 정도로 커졌다. 1380년 왜적은 500척의 군선을 이끌고 쌀을 약탈하기 위해 진포(鎭浦, 현재의 군산)를 거점으로 전라도로 침략했다. 당시 왜군들이 싸움에 능해 백병전으로 맞붙기에는 고려군은 모든 면에서 열세였다. 육지에서의 싸움이 불리할 것으로 판단, 고려 수군은 선상 전투를 결정했다. 병법에 능했던 최무선은 배 위에 화포를 설치하고 왜군을 기다렸다. 왜군은 500척이라는 대군단을 이끌고 덤볐지만, 최무선의 화포의 위력과 전략에 단 한 척도 남기지 못하고 괴멸되었다. 조선의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가장 많이 침몰시킨 왜선 규모가 200척인 것을 생각하면 최무선의 승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가늠할 수 있다. 이처럼 전 세계 수군 역사상 짧은 시간에 큰 성과를 냈던 고려 때의 진포대첩이 우리 역사 속에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