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태종 무열왕은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나요?
신라시대에는 골품제로 인해서
자기 출신에 따라 오를 수 있는 관직이 정해져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태종 무열왕의 경우에는 성골이 아닌 진골 출신이었고
이전까지는 성골출신만이 왕에 올랐었는데
어떻게 신분을 뛰어넘고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가 태종 무열왕 이래로 국세를 신장하게 되면서, 진골은 기존의 왕족뿐 아니라,
정복지의 왕족까지 흡수하는 표현이 됩니다. 한 예로, 가야의 왕족 김씨의 후손인 김유신은 진골 대접을 받았으며,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부흥운동의 지도자였던 안승도 김씨 성을 하사받고 진골 대접을 받았습니다.
신라 관직 상에서 1등급부터 5등급까지는 진골 이상의 출신들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26대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어서 성골출신만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관례에 따라 선덕공주가 27대 선덕여왕이 되었으며 28대는 선덕의 동생인 진덕이 왕에 올라 진덕여왕이 되었으나 절손이 되어 대를 이을 수 없게 되자 진평왕의 아버지가 빨리죽자 진평왕의 작은 아버지가 25대 진지왕이 되었으나 포악하고 폐륜적이어서 폐위됩니다. 그 진지왕의 아들이 바로 김춘추의 아버지입니다. 유추하면 진지왕이 폐위되지 않았으면 김춘추의 아버지가 왕위를 이었을 것이고 이어서 김춘추도 왕위를 이었을텐데 진지왕이 폐위되자 아들도 왕위에 오를 수 없어서 진평왕이 왕이된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29대 태종 무열왕에 오르게 됩니다. 성골이 아닌 진골출신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춘추는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제세(濟世)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진덕여왕을 섬겨서 관등이 이찬에 이르렀다. 진덕여왕이 죽었을 때 여러 신하들이 처음에는 왕위계승자로서 상대등 알천(閼川)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알천이 자신의 늙음과 덕행의 부족함을 들어 사양하고 그 대신 제세의 영걸(英傑)로서 김춘추를 천거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추대를 받아 즉위하여 신라 중대왕실(中代王室)의 첫 왕이 되니 당시 나이가 52세였다.
그의 즉위에는 오래 전부터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해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간의 정치적 · 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
즉, 진지왕계인 김용춘 · 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이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필요하였다. 또한 금관군주 김구해계(金仇亥系)인 김서현 · 김유신은 김춘추계의 정치적 위치가 그들의 출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호이익에 입각한 양파의 정치적 결탁은 신라 중고왕실(中古王室)의 진골귀족 내에서 새로운 신귀족집단을 형성하게 되어 구귀족집단의 반발을 받았다. 선덕왕대 중반기까지는 적어도 신귀족과 구귀족의 세력균형이 이뤄진 듯하다.
그러나 642년(선덕여왕 11)에 신라의 서방요충인 대야성(大耶城)이 백제에게 함락되고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 부처의 죽음은 김춘추계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김춘추로 하여금 대외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게 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대야성에서의 원한을 갚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을 위한 이 외교는 진흥왕 때에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공취한 한강 상류유역의 영토반환문제로 인해 결렬되고, 오히려 김춘추는 고구려에 억류당했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와 같은 대야성에서의 패배와 고구려에 대한 외교의 실패 등은 김춘추와 김유신계의 정치적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결합을 바탕으로 김춘추는 647년에 일어난 구귀족세력인 상대등 비담(毗曇)의 반란을 진압시킬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구귀족집단의 대표자인 비담이 선덕여왕을 옹립하고 있는 신귀족집단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오히려 김춘추 · 김유신계의 신귀족세력에 의해서 30여 명이 숙청당함으로써 분쇄되고 말았다.
이 정변의 와중에서 선덕여왕이 죽자, 신귀족은 구귀족과 일시적으로 제휴하여 진덕여왕을 즉위시키고, 구귀족세력의 대표인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비담의 반란 진압과 진덕여왕의 옹립 과정에서 김춘추 · 김유신계는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덕여왕대에는 김춘추에 의한 새로운 방향으로의 외교활동과 내정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에 실패하자, 다시 당나라와의 관계강화를 위해 648년(진덕여왕 2)에 당나라에 파견되어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당 태종으로부터 백제공격을 위한 군사지원을 약속받았다. 김춘추에 의한 친당정책은 650년에 신라가 중고시대 전기간을 통해 계속 사용해오던 자주적인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인 영휘(永徽)를 신라의 연호로 채택한 데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김춘추는 귀국 후에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내정개혁을 주도하였다. 649년 중조의관제(中朝衣冠制)의 채택, 651년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正朝賀禮制)의 실시, 품주(稟主)의 집사부(執事部)로의 개편 등 한화정책(漢化政策)이 그것이다.
김춘추에 의해 주도된 내정개혁의 방향은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하고 왕권강화를 실제적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진덕여왕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김춘추 자신이 즉위할 경우에 대비한 정지작업으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친당외교와 내정개혁을 통해 신장된 신귀족세력의 힘을 기반으로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 화백회의에서 섭정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그와도 일시적으로 제휴했던 구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알천을 배제시키면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김춘추는 즉위에 있어서 그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되었던 만큼 화백회의에 의해 추대받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로써 구귀족으로부터 신귀족으로의 권력이양과 왕위계승의 합법성 내지 정당성을 유지하려 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태종 우열뢍 김춘추는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 로 골품제 라는 신라의 특수한 사정상 즉위 직전까지 태자 및 후계자가 아니었으며, 마지막 성골 인 진덕여왕 이 승하한 후 화백회의 의 합의에 의해 왕으로 추대 됩니다. 진덕 여왕을 마지막으로 신라에서는 더이상 성골 출신 왕이 아닌 진골 출신도 왕이 될수 있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신라의 태종 무열왕은 654년 신라 진평왕 26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김춘추, 어머니는 천명공주입니다. 김춘추는 신라의 고위 관료였고, 천명공주는 백제의 왕족이었습니다. 무열왕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신라의 왕이 되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681년 무열왕은 신라의 태자이자 진평왕의 후계자인 김용수와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은 무열왕이 신라의 왕위에 오르기 위한 첫 걸음이었습니다. 688년 진평왕이 죽자 무열왕은 왕위에 올랐습니다. 무열왕은 즉위 후 신라의 국력을 강화하고,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했습니다. 또한, 불교를 장려하고, 유학을 도입하여 신라의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무열왕은 694년 41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그는 재위 6년 동안 신라를 번영시킨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무열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뛰어난 재능
신라의 왕족인 천명공주와 결혼
신라의 고위 관료인 김춘추의 아들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여 신라의 국력을 강화
불교를 장려하고, 유학을 도입하여 신라의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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