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업계의 아타리 쇼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게임 업계에서 아주 유명한 사건으로 알고 있습니다.
게임 갖다 버리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하던데요.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요?
안녕하세요. 거북이놔두루미입니다.
게임 업계에서는 이 위기를 1929년 10월 24일에 일어난 주가 대폭락 사건인 검은 목요일에 비교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으며, 이후 아타리 쇼크란 단어는 게임 소프트웨어의 과잉 공급에 의해 소비자의 흥미가 급속히 떨어져 단번에 시장 수요가 사그라드는 현상을 뜻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오잉ee입니다.
아타리 쇼크가 발생한 1983년 전, 1982년까지 30억 달러 규모까지 북미의 비디오 게임 산업이 미친 듯이 성장했었습니다. 그러다 1983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 산업이 한 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이 사태가 진정된 1985년에는 약 1억 달러 수준에 그친 산업 규모의 회복을 보여주었습니다.
게임 회사 "아타리"는 1972년 11월 "퐁(PONG)"이란 게임을 선보이며 시장에 진출하였고, 많은 게임들을 선보이며 디지털 문화 산업의 토대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막대한 자금과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게임 뿐만 아니라 게임기 개발을 시도하였죠. 소프트웨어 개발 뿐 아니라 이를 이용할 플랫폼을 장악하는 것이 훨씬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한 설립자 "놀런 부슈널"은 76년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에 2천8백만 달러에 회사를 매각 후 게임기 개발에 착수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나온 것이 "아타리 2600"입니다. "팩"을 이용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죠.
게임(소프트웨어)과 게임기(플랫폼)에서 영향력을 갖게 된 아타리는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주지 않자 개발자들은 정당한 보수를 요구하였지만 아타리는 이를 무시하였고, 결국 주요 개발자들은 퇴사를 하게 됩니다.
퇴사한 이들이 다시 모여 "액티비젼"이라는 회사를 창립하였고, 이들은 "아타리 2600"용 게임을 개발하였습니다. 하지만, "아타리" 사는 주요 개발자가 모두 퇴사하여 게임기 판매량을 올릴 게임이 절실히 필요하였죠. 두 회사는 저작권 소송을 거쳐 로열티 지급 조건으로 합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타리 사는 "서드파티" 게임의 개발로 80년 한 해 2억 달러라는 매출을 기록하였고 이 때부터 "게임 = 돈"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졌습니다. 당연히 많은 업체가 이 기세에 합세를 하고자 하였고, 불법적인 게임도 만들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성인 게임도 만들어졌고, 불법 복제 등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홈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TV와 연결하여 즐기는 게임기의 시대가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서서히 시대가 변하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맞춰 시대적 상황은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이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시 "발주"기반 이었기 때문에 시장의 수요를 예측하기 어려웠던 것이죠. 수요에 따른 공급이 아닌 공급 후 수요는 알아서 해라. 라는 시스템 이었습니다.
이 때 팩맨의 등장한 팩맨은 700만 여장을 판매하였지만 재고는 500만 장이 남아있었습니다. 판매를 하였지만 각종 버그 등의 문제로 반품 요청이 늘면서 "아타리" 사의 재정에 영향을 끼쳤지만 사측은 이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였고, 당시 언론이나 증권사에서 아타리사의 말도 안되는 성장폭을 예상하면서 모든 문제를 기우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개발된 게임들이 성공을 하지 못하자 아타리 사의 기세는 꺾였으며 이로 인해 많은 관련 업체의 주가는 곤두박질 쳤습니다. 당시 상황을 타파하고자 연말출시를 목표로 개발자들을 갈아서 만든 아타리 2600 E.T.가 400만 판매의 예상을 뒤엎고 50만 개 수준으로 판매되며 망함의 증조를 보였으며 이마저도 1983년 상반기에 많은 양이 버그 등 조잡한 게임이라는 이유로 반품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운명의 1983년, 저조한 판매실적을 보이자 개발업체와 게임업체 중 몇 업체가 서서히 도산하기 시작하였으며 30달러였던 게임을 5달러로 판매하면서 버티고자 하였지만 이마저도 소비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습니다. 역시 이를 버티지 못한 업체들이 줄도산을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천문학적인 손실을 기록하면서 "아타리"는 각 산업부문으로 분해되어 매각되었습니다.
더욱 요약하자면
1. 무분별한 라이센스 제공
2. 품질보다 판매를 위한 개발과 개발자들의 처우개선 무시
3. 시장 예측 실패
4. 성공의 단맛에 빠져 현실 파악을 하지 못한 경영진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일어난 북미 비디오 게임 산업계의 대규모 경기침체 사건을 일컫는 말입니다.
1982년에 30억 달러정도 였던 북미 게임 시장 규모가 1985년에 거의 1억 달러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놀런 부슈널은 1972년 6월에 회사 아타리를 만들었고, 같은 해 11월에 퐁을 내놓았습니다. 그후 게임기와 게임을 지속적으로 내놓으며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빠른 성장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게임시장이 너무 빨리 성장해서 아타리라는 회사가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아타리를 따라한 불법 복제 제품이 늘어났습니다. 게임기 뿐만 아니라 불법으로 아타리에서 작동가능한 게임을 파는 회사도 생겨났습니다. 초기의 아타리는 이것을 어떻게든 통제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게임 수준의 질적 하락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아타리의 경영진은 계속 게임산업이 성장할 것이라고 보았고 낙관적인 전망으로 게임을 생산하고 재고가 남아 손해보는 상황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결정타를 먹인 사건이 그 유명한 ET입니다. 거대 IP로 만든 이 쓰레기 게임은 400만개나 만들었지만 50만개만 팔려서 아타리에게 치명적인 재정적 타격을 줍니다.
이것은 아타리 뿐만 아니라, 게임시장에 참여한 후발주자들도 마찬가지였고 게임회사들이 줄 도산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리고 1985년 망해버린 북미 게임시장에 닌텐도가 게임기라는 이름을 빼고 엔터테이먼트 시스템이라고 이름을 붙인 게임기를 판매하고 성공하게 됩니다. 닌텐도는 아타리의 실패를 교훈삼아서 철저하게 품질관리와 재고 관리를 했습니다.
이 사건이 북미 게임 시장 붕괴가 아니라 아타리 쇼크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 시절 아타리라는 게임회사의 영향력이 너무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아타리 쇼크가 붕괴한 이유도 아타리라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기업이 자사 게임의 품질관리와 재고관리에 실패한 것이 가장 큽니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