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패나 농악대 같은곳에서 상쇠, 고수, 돌쇠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알려주세요
두레패나 농악대에서 상쇠, 고수, 돌쇠와 같은 사람이 맡은 역할과 기능에 대해 알려주시고 이외 또다른 역할들을 하는 사람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풍 물 이 란*
원래 여러가지 명칭
(1) 굿 : 상고시대 칼이나 창으로 그릇을 두드리면서 그 소리로
노래와 춤의 반주를 삼아 뛰어놀았고 그 그릇을 우리말로 구유 또는
구사라고 하였으니 <구시치기>의 준말이 <굿>이 되었다. 그 후에
고구려,백제시대에 구취의 한자 발음이 중국에서 들어와 <구사>가
<구치>로되어 <굿>이란 발음으로 불리어졌고 조선시대에 <고사>의
발음으로 또한<굿>이라하였다.
(2) 군몰 : 군사훈련 및 전쟁에서 군사를 내몰아칠때 사용하는 고무,
고취한다는 뜻으로 우리말의 <군몰이> 또는 <군악>등으로 쓰이고
궁중의 나례의식에서 귀신 쫓는다는 뜻으로 <구나(驅儺)>라고도
하였으며 굿을 할 때 신을 모시는 많은 깃발을 들고 굿을 치므로
<기물>, <기몰>이라고도 했으니 신라 시대에는 <사내기물악>이라고
하였다.
(3) 매구 : 부여시대부터 <맞이 굿>이란 뜻의 <여고>가 성행 하였으며
나례굿에서 잡귀를 쫓거나 신을 맞이한다는 말이다. 신라 시대에는
원효 대사가 <매구>를 치며 불교적인 향가를 부르며 돌아다닌 일이
있는데 이것은 불교용어로 <무애무> 라고 불렸던 것이 아닌가 한다.
(4) 걸굿 : 사찰의 보수 및 건축 기금 등을 모금하는 굿으로 가정을
방문하여 집안 신에게 매굿 과 고사굿을 해주고 양식과 베 돈 등을
받는다.<동량(돌이굿)> 이나 <걸립>,<걸량> 이라는 이름으로도 기록이
되어 있다.
(5) 두레 : 들굿,두렁쇠등의 들농사를 뜻하기도 하며<돌아다니는 굿>
으로 육은회, 윤경, 돌림 불경 등의 뜻도 된다. 신라시대의
<두레놀이>,화랑도의 도(徒)와 길굿(道)의 뜻으로 <일꾼의 굿> 이란
말로 쓰이고 있다. 마한시대에는 소도의 도(塗)라는 뜻으로 <농사신
굿>을 뜻하였다.
(6) 풋굿 : 푸리굿과 살풀이 등의 뜻으로 <신에게 소원을 푼다는
뜻이지만 농사의 <풀밭 농사>로 해석하는 경향도 많다.
(7)풍물 : 풋굿과 같이 신풀이 살풀이의 뜻으로 소원을푼다는 뜻으로
풍년을 기원한다는 <풍장(풀이장구)굿>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8) 농악 : 1870년까지도 판소리 춘향가에 두레굿이라고 기록되었으나
농업장려의 운동으로 원각사의 협률사 단체에서부터 처음으로
농악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일제 시대에 일본의 가면극
능악(能樂)의 발음<노까구>를 <농악>으로 붙여 버린듯하다.
또 일본인들이 우리의 민속 신앙을 말살하기 위하여 농사장려의
목적에 한해서만 두레굿을 허락했기 때문에 굿하는 단체들이
<농악>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신청을 한데서 일반화 되었다.
지금도 삼남지방에서는 대부분<굿>이나 <매구>로 불리고 있으나,
까닭도 모르는 메스콤 등에서 <농악>으로 써왔기 때문에 전민족의
<민악>이 일부 농민에게 구한된 <농악> 이 되고 말았다.
→ 굿이든 매구이든 풍물 또는 두레이든 기본적으로 생산 활동 과의
깊은 관련속에서 나온 말이다. 굿--풍물 내지 두레로 올수록 노동과의
관계가 더욱 직접적이 되고 재의성 종교성은 감소된다. 그러나 용어로
보았을때 위와같은 흐름을 생각하는 것이지 실제로 일년 중 일이 많을
때와 적을 때,세시에따라 여러용어가 공존했다
풍물이라 하는 이유
(1) 풍물은 농악이라고 일컬을 때의 단순한 음만이 아니라,음(가락)
과 춤과,재담,극과놀이와 의식이 통일적으로 결합된 종합 표현
매체이다.
(2) 원시사회 이래 민족의 생활과 노동의 리듬으로 형성된 생활과
노동, 놀이 즉 농경문화속에 노동과 함께 나타난 민중의 생활의식,
공동체적 문화 양식이다.
(3)이러한 종합적인 형태, 기능을 가진 것이 자본재 사회로
넘어오면서 그 사회의 특성으로 인하여 전문화 분화 된것이 오늘날
<농악>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분화 되었던 각 표현매체들을 다시 종합하려는 노력과
공동체, 공동체문화를 형성하려는 노력이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시기이며 따라서 풍물을 통일적으로 인식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4)풍물이 농경사회의 공동체속에서 생성 발전되어 왔으나, 지금은
전통시대와는 달리 상이한 구조와 조건속에 놓여있는 다양한
생활공간에 모두 필요하다.
(5)전통적이고 생활, 노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 굿 > 이나 <
두레 > 처럼 다른 의미를 내포하여 혼란을 일으키지도 않는 < 풍물 >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풍물원론
1. 기원 및 역사
1) 기원
풍물의 기원은 원시사회의 소급 제천의식에 기원을 두며 노동의 리듬,
즉 생산활동의 리듬으로 부터 풍물이 태어났다.
→ 최초 문헌 : 삼국지 , 위지동인전 , 마한조.
→3 가지설 : 풍농과 안낵기원설 , 군악설 , 불교관계설.
현재의 풍물의 모습이 되기까지의 변천단계를 설명하는것으로 보이며
이 3가지학설은 하나의 통일된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할것이다.
2) 역사
축원 형태 + 노작 형태 → 걸립형태(사당패) → 연희형태
위와 같이 통시적인 분류가 가능하나 각각의 형태가 어울려
공식적으로 행해졌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특희 축원 형태와 노작 형태를 시간순으로 배치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 풍물의 발생에 있어 생산성에 중점을 두느냐 종교적의식에 두느냐에
따라 선,후관계가 이루어질수 있다. 그러나 고대사회에서 종교의식은
생산의 풍요를 위한 의식 이겠고 , 문화의 생산성 , 의식성이 엄밀히
구별될만큼 분화된 사회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 노작 형태 , 축원 형태에서의 연희 형태로의 이행과정
: 노작 , 축원과 연희의 중간형태로서의 걸립 , 걸궁을 막연히 불가의
굿중패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는 견해. (호남 풍물의 정외굿을
걸궁굿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 두레 조직내의 지신 밞기 형태에서 자생적 분화 형태로 보는견해
: 생산 , 신앙과 겨부되어 발생한 놀이가 역사의 흐름속에서 사회분화
과정과 계기를 같이하면서 변해왔음은 쉽게 유출할 수 있으며 ,
풍물과 사회경제의 관련속에서 풍물이 변모해 왔으며 불가 , 군중들의
외부적 영향을 주체적으로 수용했으 리라고 상정함이 마땅하다.
1) 구성원의 차이에 따라
(1) 두레패 연희 : 농촌의 자생적 두레집단(공동(집단)노동)과 연희를
총칭한다.
여기서는 좀더의미를 확장하여 생활 공동체, 노동 공동체에서의 모든
연희로 구성.
(2) 사당패 연희 : 재인 광대의 연희및 각양의 유랑인 집단의 연희.
걸립패로 부터 기능적인 부분만 전문으로 추구.
2) 놀이판의 단위에 따라
(1) 정외굿 : 들 당산굿, 문굿, 당산굿, 날 당산굿 ....
(2) 정내굿 : 문굿(집앞에서) , 마당굿, 조왕굿, 철용굿, 곡간굿,
측간굿....
3) 두레패 연희에서 걸립패(사당패) 연희로의 발전 배경
: 19세기 상품화폐 관계의 출현으로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생산과
문화가 동일된 생산계급의 문화였던 두레 풍물은 생산으로 부터 연희
기능이 분리되었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변화에서 필연적인 변화였다고 볼 수
있다. 형식면 , 기능면에서 발전한 사당패라는 전문 예술을
탄생시킴으로써 풍물이 전문 예술로 발전할 가능성을 주었다.
3. 구 성
1) 악기의 구성
: 나발 , 닐리리 , 쇠 , 징 , 장고 , 북 , 소고 , 바라 등
2) 치배의 구성
: 영기(2) , 용기 , 농기 , 쇠(2,3) , 징(1,2) , 장고(2,3) , 북(2,3)
, 소고(6,8) , 잡색(대포수 , 집사 , 농구 , 양반 , 할미 , 각시 , 중
등)
대포수 -- 경상도 : 포수 , 충청도 : 도정
4. 변 천 사
1) 조선 중,후반기
: 유교사상에 젖은 양반들(사대부)에 의해서 전래 민속굿은 멸시를
받았으며 겨우겨우 명백만 유지 하게되었다.
이앙법의 도입과 농사기술의 발달과 두레(마을공동체 노동조직) 에
의해서 민속굿이 농민들에 의해서 흥을 돋구며 고통을 즐거움으로
전환시키며 노동의 능률을 올리고자 하였으며 마을내의 두레
공동체에서 통합과 단결력을 강화함으로서 두레 공동체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는 역활을 하던 두레패 연희와 두레패 풍물이 발전하면서
보여주기 위한 여러 기량이 선보여 지면서 다른 마을로 초청되던
걸립패 풍물이 발전하였으며 이때부터 판굿의 발전이 활발해 지기
시작했다.
19세기말 자기마을에서 근거를 떠나 노동으로 부터 분리되고 기량이
뛰어난 풍물패들이 담고 있는 생산 계급 문화로서의 내용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2) 일제시대
: 두레 공동체에 대한 철저한 탄압과 함께 풍물 역시 민족적인
유대감과 일체감을 형성하는 한민족의 뿌리깊은 문화였기 때문에
일제에의해 "낭비적인 것" "미신적인 것" 이라하여 철저한 탄압을
받았다.
태평양 전쟁이후 징,쇠 등을 공출로 약탈,두레 공동체의 파괴와 함께
두레패 연희가 급격히 쇠퇴하 였다.
3) 해방 후 -- 70년대 중반
: 두레패적 연희는 일제시대 강제적인 파괴에 의해 서구의 개인주의적
문화의 홍수에 의해 더욱 쇠퇴하였다.
: 70년대 초 유신체제의 새마을 운동으로 민족적 전통을 무시한
서구적 합리주의적 발상으로 역시 민속적인 것을 미신 , 낭비적인 것
이라하여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당산 , 악기등을 없애버렸다.
4) 70년대 말 -- 현재
: 관주도적인 형식적 전통문화의 보존에 의해 풍물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 기능 즉 두레패적 연희의 회복 보다는 지배 이데올로에
봉사하는 껍데기뿐인 매스 게임의 형태로의 이행이 조장됨.
관제문화, 상업적 대중문화, 서구, 일본의 퇴폐문화의 홍수 속에서
문화 본연의 기능은 지배층, 재벌의 지배 논리에 철저히 이용되고
대중의 비판 감각을 마비시키는 수단으로 이용.
5. 풍물의 특성 및 극복과제
1) 풍물의 특성
→풍물은 전통시대에서 가장 보편적인 민중문화 매체 이었으며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다.
(1) 원시적 충동성으로 집단적 신명을 가장 보편적인 민중문화를 가장
손쉽게 능률적으로 이끌수 있다.
(2) 공동체가 있는 곳은 풍물이 항상 있었으며 풍물을 통해 집단력,
협동심, 행동력을 얻을 수 있다.(두레 공동체)
(3) 간단한 편성으로 수 많은 인원을 움직일 수 있다. ( 진풀이를
통해 대규모 집단적 행동과 의지의 표출이 가능)
(4) 놀이 자체가 동태적이며 놀이판이 고정되지 않는다.
(5) 민속 연희중에서 아직까지 기반이 가장 튼튼하고 재창조 가능성이
크다.
(6) 다른 매체와는 달리 거부감이 없어 친숙하게 받아들여 지므로
도시나, 농촌이나, 학교, 생활현장, 노동현장을 불문하고 풍물놀이가
가능하다.
(7) 다른 민속 연희를 포용력 있게 수용할 수 있으며 그 자체가
대동놀이적 성격을 지닌다.
2) 극복 과제
위와 같은 여러 특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시대의 풍물 부흥운동은
몇가지 극복 되어야 할 문제점이 있다.
(1) 기능을 쉽게 습득 할수있는 방법개발(입 장단) 및 체계적인 학습
방법이 필요하다.
(2) 의식 전달의 힘 미약 -- 원래 풍물의 성질 즉 가락, 춤, 노래,
잡색놀이 등의 복합체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가락과 춤에만 한정시켜
생각하기 때문.
(3) 지배 이데올로기의 매체이용에 반격할수 있는 풍물 이론 및
다양한 놀이등을 개발 보급하여야 한다.
( 생할과 밀접한 예술 형태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6. 발전적 방향 모색
(1) 풍물 자체를 구성하는 연희적, 음악적, 무용적 측면을 분석하여
그 안에서 각측면의 외양을 표출 해내는 법칙성을 추출해 내야된다.
(2) 현재의 풍물을 수용 향유 가능한 계층의 미의식, 생할의식,
가치관, 이념체계등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하여야 된다.
(3) 공동체의 일체감을 더욱 공고히 할 다양한 놀이 개발.
(4) 각각의 장에 적합한 활동 형태 구상
㈀ 농촌현장 : 두레활동, 뜬패활동, 뜬 두레패 활동 등 자극과 구심점
역활까지도 할 수 있다.
㈁ 노동현장 : 두레패 활동과 마찬가지로 기능의 전수와 풍물패
조직을 시도한다.
: 자제의 공동체의식의 성숙의 계기로서 지신밟기, 형태를 권장할수
있다.
: 대동놀이적 성격으로서 다른 매체들과 아울러 공동작업 함으로써 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 시,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는 형태로 입 장단 놀이,진풀이등을
개발하여야 한다.
㈂ 학 교 : 풍물이 문화운동의 기본적인 매체로 할때 타 매체를
가지고 있는 집단에서도 기능을 가질수 있도록 한다. 기능 습득이
어렵기 때문에 풍물을 전담할 집단을 만들어 재생산 구조를 형성 또한
학내의 대동놀이등을 공동작업이 필요할때 역할 분담이 잘 이루어
지도록한다. 시, 공간적 제약을 극복함으로써 저변 확대의 측면에서
입 장단놀이, 진풀이등의 적극적 개발이 필요하다.
++++++++++++++++++++풍물의 악기++++++++++++++++++++++++++
꽹과리
꽹과리는 쇠, 매구, 깽매기, 깽쇠, 광쇠, 꽝쇠, 소금(小金), 동고, 쟁
따위로 불리며 흔히 꽹과리를 치는 사람을 쇠치는 사람(쇠치배)이라고
부른다. 앞치배들 가운데 맨 앞에서 쇠를 치는 사람을 '상쇠'라 하는데,
상쇠는 풍물굿패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쇠는 놋쇠를 원료로 만드는데, 요즈음에는 금이나 은을 섞어 쓰기도 한다.
놋쇠는 구리와 아연을 섞어서 만든 것으로 구리의 합금 비율이
높으면(60∼70%) 소리가 높고 맑게 나지만, 아연의 합금비율이 높거나
납을 섞어서 만들면 소리가 낮고 탁하게 나며 울림이 헤퍼서 오래 가지
않는다. 꽹과리의 크기는 지름이 대략 21cm(7치), 둘레 부분은 높이가
3.6cm(1치 2푼) 정도이다. 쇠채로 쇠의 가운데와 전두리(쇠의 테두리)
사이를 친다.
꽹과리 채의 길이와 크기도 지역이나 굿을 치는 목적에 따라 다르다.
특이한 것은 경북 빗내 진굿의 쇠채는 다듬이 방망이를 쇠채 모양으로
깎아서 만들어 쓰기도 하며, 옛날 어른들은 북채나 막대기로 쇠를 치기도
하였다. 쇠를 칠 때는 한 손 (오른손잡이는 오른손에 해당함)에 쇠채를
잡고 쇠를 쳐서 소리를 내고, 한 손은 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조절을 한다. 음색에 따라
수꽹과리, 암꽹과리로 나뉘는데 수꽹과리는 소리가 야물고 높으며
암꽹과리는 소리가 부드럽고 얕다. 수쇠와 암쇠가 서로 받아치며 하는
놀이는 마치 암새와 수새가 서로 이야기하듯 소리가 잘 어울린다.
꽹과리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신라시대 때 만들어진 듯하고,
다른 한 가지는 고려 공민왕 때 주나라에서 만들어져 중국 명나라 때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꽹과리는 장구와 아울러 율동악기로서 으뜸인데 옛날에는 군악이나 정악,
무악, 풍물굿 등 두루 쓰였으나, 풍물굿에서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가락으로 사람의 느낌을 고조시키고 흥을 돋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징
놋쇠로 만드는 타악기의 하나로 본래의 소리는 '정'(鉦)이나 징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옛 군악인 고취악에서 쓰던 까닭으로 고취징이라는
별명도 있고, 그 밖에 나, 금라(金羅), 금(金), 대금(大金), 금정(金鉦)
등의 이름이 있다. 쓰임새는 넓어서 군악의 행진곡을 비롯한 무악과
풍물굿 등에 쓰이며 절에서도 쓰인다.
징은 고려 공민왕 때 중국 명나라에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고,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회 박물관에 있는 고려시대의 징으로 보아 징의
역사는 고려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보인다. 아울러 그
쓰임의 단순함으로 미루어 볼 때, 꽹과리보다 먼저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
징의 울림이 직선적으로 하강하는 느낌을 주는 것은 좋지 않고, 울림이 몇
고개를 넘어서 끝이 올라가서 맺는 것이 좋다.
징의 크기는 대략 지름이 약 36cm, 둘레의 높이는 10cm이며, 징의 쇠
두께는 3mm 정도이다.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사물의
가락(쇠, 장구, 북, 소고)을 모두 감싸서 멀리 울려 퍼지게 한다. 풍물굿
악기 가운데 가장 은은한 소리를 내며 포용력이 있는 악기라 할 수 있다.
징을 칠 때는 징 채를 짧게 잡고 징의 한가운데를 부드럽게 밀듯이 쳐야
소리가 되바라지지 않고 웅장한 소리를 낸다. 징은 연주가 다양하지 못한
단점이 있으나 바로 그런 이유로 발림이 다양하고 여유가 있어 춤으로
신명을 표출하기가 좋다.
징을 치는 횟수에 비해 그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징이 정확한 박으로
제대로 받쳐 주지 못하면 다른 치배의 장단이 어지러워지고 불안하며,
장구나 쇠, 북 모두가 제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다. 옛날에는 징을
나무틀(ㅏ자모양)에 걸고, 그 나무틀을 왼쪽 몸에 대고 끈으로 묶어서
다니기도 하였다.
장 구
가죽 타악기의 하나로 양편 머리가 크고 그 허리가 가늘다 하여
세요고(細要鼓)라고도 한다. 이름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으나, 한자로
지팡이장(杖)과 북고(鼓)를 쓰면 장고가 맞고, 노루장(獐)과 개구(拘)를
쓰면 장구도 맞다. 풍물의 현장을 조사하는 가운데, 전북 진안 김봉열
선생님과 강원도 강릉 박기하 선생님도 옛날부터 어른들께서 장구의
가죽을 노루가죽과 개가죽으로 썼다 하여 장구가 맞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보통 장구라고 많이 부른다. 여기서도 장구로 통일해서
부르기로 하였다.
왼쪽(북편, 궁편)은 말가죽이나 소가죽, 노루가죽을 대 가죽이 좀 두껍고
소리가 낮으며, 오른쪽(채편)은 보통 말가죽이나 개가죽을 대 가죽이 얇고
높은 소리를 낸다. 가죽으로는 개가죽이 소리도 크고 제일 좋다. 장구의
통은 사기, 기와, 쇠, 나무, 바가지, 양철 따위를 쓰는데, 보통
미루나무와 오동나무를 많이 쓰고, 오동나무가 가벼우며 소리도 좋다.
장구통의 궁통과 채통을 이어 주는 곳을 조롱목이라 하는데, 조롱목이
너무 넓으면 소리가 헤프고, 조롱목이 너무 좁으면 소리가 되바라진다.
장구통을 만드는 방법에 따라 통째로 깎아 만든 통장구와 나무조각을
깎아서 보통 두 쪽 내지 세 쪽으로 맞춘 쪽장구가 있다. 철테(원철)
둘레에 8개의 쇠고리(쇠갈고리, 구철)를 걸어 무명을 꼬아 만든 줄(숫바,
홍진사, 축승)로 얽어 매고, 죔줄(축수, 부전)을 좌우로 움직여 소리를
조절한다.
장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 문종 30년(1076년)에
대악관현방(大樂菅絃房)을 정할 때 장고업사(杖鼓業師 : 장구 연주자라는
뜻)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장구보다 작은 크기의 장구를 요고(腰鼓)라
하고 인도에서 만들어져 중국 남북조 시대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하며, 고구려 집안현 제4호 무덤벽화와 신라 상원사 동종의 아래쪽에
그려진 주악도, 그리고 감은사지 청동제 사리기 기단에 그려진
그림(통일신라 신문왕 2년, 682년)에서 볼 수 있다.
장구가 요즘에 쓰이는 형태로 크기가 커진 것은 고려 때로 추측되며,
장구가 중국에서 만들어져 우리나라로 전해진 것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중국 한 무제 때 만들어져 고려 예종왕 9년 송나라에서
새로운 악기가 들어올 때 장고이십면(杖鼓二十面)이 포함된 기록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장구가 중국 당나라 때부터 쓰여 고려 때 들어왔다는
견해가 있다.
『고려사악지』의 [당악기조], [향악기조]에 각각 장고가 들어 있고, 조선
세종 때 『악학궤범』 에 의하면 장구(장고라 쓰였지만 여기서는 장구로
통일함)가 당악과 향악에 어울려 쓴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장구는 처음에
당악(당에서 들어온 음악), 향악(옛날부터 내려오는 우리의 음악)에
쓰였으며 지금은 정악, 산조, 잡가, 민요, 풍물굿, 무악 등 거의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장구의 옛날 꼴로 생각되는 물장구,
모래장구도 있었다고 한다.
장구의 채로는 궁채(궁글채)와 열채(가락채)가 있는데, 궁채는 대나무
뿌리를 잘 삶아서 똑바로 편 다음, 끝부분에 박달나무와 같이 단단한 나무
또는 뿔을 끼워서 만들고, 열채는 대나무를 깎아서 만든다. 두 손으로
치기 때문에 가장 다양한 소리를 내 어깨춤이 절로 나게 만든다. 분위기를
흐드러지게 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악기이며, 민요나 춤
장단을 칠 때는 궁편을 손으로 치기도 한다. 장구를 메는 방법도 지역이나
사람마다 다르고, 그 나름의 맛을 제각기 갖고 있다.
북
북은 꾸밈새가 간단한 까닭으로 그 역사가 오래되고 세계 어디에서나 그
발생을 볼 수 있으며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다. 곳과 쓰임에
따라서 여러 가지 종류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풍물굿의 악기 가운데에서
북은 가장 오래된 악기다. 그 까닭은 청동기시대 이전의 목축시대에 만들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악기기 때문이다.
풍물굿에 쓰이는 북은 어깨에 메기가 간편하고 소리가 옹골찬 것을 주로
쓴다. 오동나무나 미루나무의 가운데를 파내고 양편에 소가죽이나
말가죽을 대고 양쪽 가죽을 줄로 엮고 조여서 만든다. 요즘은 나무판을
엮어서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다.
북은 잔가락을 운영하는 것이 주가 아니므로 다양한 가락의 연주보다는
박을 힘있게 짚어 가면서 그 기상을 힘찬 춤으로 펼쳐 나간다. 북은 치는
방법에 따라 보통 왼쪽 어깨에 메고 치는 외북과, 북을 허리에 북끈으로
고정시키고 두 손에 두 개의 북채를 잡고 치는 쌍북이 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춤 위주의 외북을 치고, 쌍북은 상대적으로 가락에 치중한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장구가 발달하여 북소리를 장구의 궁편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으나, 경상도에서는 북이 발달하여 장구의 역할이 감소한다.
따라서 북놀음이나 북가락은 경상도 지방에서 많이 발달되었으며, 전남
진도의 북춤 에서는 두 손에 북채를 들고 추는 춤사위가 뛰어나다. 북의
크기도 곳에 따라 다르다. 대체로 경상도 북은 크고 넓으며 전라도 북은
작은 편이다. 북치는 사람의 자리도 경상도에서는 꽹과리, 징 다음에
선다.
북과 소고의 중간 형태로 버꾸라고 불리는 악기가 있다. 크기는 북과
소고의 중간이고 형태는 북통에 나무 쐐기 없는 북과 같다. 버꾸는 끈을
짧게 하여 손에 감거나 따로 손잡이를 만들거나 하여 손에 버꾸를
고정시키고 친다. 북보다 가볍기 때문에 보다 힘차고 다양한 춤사위를
나타낼 수 있다. 버꾸는 주로 전라남도 지방에서 많이 쓰인다.
소고
풍물굿에 쓰이는 작은 북을 소고라 하며 다른 이름으로는 법고, 버꾸,
매구북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소고는 대부분 손잡이가 달려 있지만,
옛날에는 손잡이가 있는 것이 별로 없었으며 (안성 풍물놀이는 지금도
끈으로 묶는다), 지방에 따라서는 오늘날의 것보다 훨씬 커서
소고잡이들이 치는 소리가 다른 풍물굿 악기들에 못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의 소고는 크기가 작아지고 얇은 가죽으로 만들며, 가벼워서 장단마다
첫박에 한 번씩 치며 춤추기도 하고 장단만 쳐나가기도 한다. 물론 웃다리
가락에서는 소고를 힘차게 치기도 한다. 소고잡이들은 상모나 고깔(스님이
쓰는 모자)을 쓰는데 전라 우도와 강원도에서는 고깔을 쓰고 전라 좌도와
경상도, 경기도, 충청도에서는 상모를 쓴다.
고깔을 쓸 때에는 종이꽃을 쓴 화려한 소고잡이가 멋드러진 춤솜씨를
보이고, 채상모 달린 벙거지(전립)를 쓸 때에는 힘찬 춤가락과 하늘을
가르는 듯한 채상의 멋과 화려함이 있는 상모놀음이 뛰어나다.
나 발
나발의 길이는 3척 8촌(약 115cm)이고, 2토막 또는 3토막으로 구분된
놋쇠로 만든 관을 아래로 밀어 넣어 짧게 꽂아 넣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나발은 고려 공민왕 때 명나라에서 군악기로 들어왔다.
풍물굿패가 어떤 마을에 들어갈 때(마을에 들어간다는 신호로 나발을 세
번 분 다음에 당산굿을 치고 들어간다), 또는 풍물굿패를 모아 떠날 때,
그 밖에 신호용으로 많이 쓰인다. 나발을 부는 사람으로서는 대포수,
상쇠, 설장구가 있는데, 이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불면 된다. 먼저 1초를
울리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치배꾼들에게 준비하라는 뜻이고, 2초를
울리면 모두 모여 떠날 채비를 하라는 것이며, 3초를 울리면 떠남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서 1초, 2초, 3초라 함은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부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부는 방식은 모두 같다.
날나리
날나리는 '태평소' '새납' '호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날나리는 조선
태조 때 명나라에서 들어온 것으로 당나라의 사성(史盛)이 만든 것이라고
전한다. 전체 길이는 약 30cm이며 관은 피리와는 달리 원기둥이 아니고
원뿔꼴이다. 관은 유자, 대추, 화양같이 단단한 나무로 만들고, 그 아래켠
끝은 나발과 같이 벌어져 있는데, 이 부분은 구리로 만들어 붙인다. 한편
혀를 꽂는 상단에도 구리로 만든 구멍이 따로 있고, 이 구멍 끝에다 작은
서를 꽂는다.
옛날에는 서를 갈대로 이용하였으나, 요즈음에는 음료수 빨대(조금 큰
것)를 알맞은 크기로 자르고 다듬어서 쓰기도 한다. 지공(구멍)은 모두
8개이고 그 가운데 첫번째 구멍은 뒷면에 있다. 날라리는 본래
대취타(군악의 행진곡)에 쓰였고 종묘제례악에도 쓰였는데, 걸립형태 때
들어와 풍물굿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으리라 본다.
++++++++++++++++++++++++++++가락+++++++++++++++++++++++++++++++++++++
휘모리 - 필봉굿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기본이 되는 가락이다
기본구음 |덩 기|덩 기|궁 따|궁 기|
|덩 기|덩 기|궁기닥|궁 기|
|덩 따 궁 기|궁 따|궁 기|
갠지갠 - 휘모리와 마찬가지로 가장 많이 연주되고 기본이 되는 가락이다
느린갠지갠 |덩 따궁|궁 따궁|덩 따궁|궁 따궁|
기본가락 |덩 구|궁따궁|궁 구|궁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