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5부에서 행정적 성격의 5부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고구려의 고국원왕때 부족적인 전통의 5부가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되었다고 하는데
기존의 부족적인 전통의 5부와
개편된 행정적 성격의 5부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요?
행정적 성격의 5부는
5부가 어떤 기능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구려오부는 고구려 초기, 국가 운영의 주축이 된 5개의 단위 정치체이다. 『삼국지』에는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 등 5개 ‘부(部)’의 이름이 등장하며, 『삼국사기』에는 비류나부(沸流那部), 연나부(椽那部), 환나부(桓那部), 관나부(貫那部)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구려 초기의 정치 권력은 국가 전체를 통괄하는 왕권과 나부의 자치권이라는 2가지 축을 중심으로 유지되었다.
정의
고구려 초기, 국가 운영의 주축이 된 5개의 단위 정치체.
내용
고구려 초기 국가 운영의 주축이 된 5개의 단위 정치체를 일컫는다. 『삼국지(三國志)』 등 중국 문헌에는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 등 5개 '부(部)'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비류나부(沸流那部), 연나부(椽那部), 환나부(桓那部), 관나부(貫那部) 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왕을 배출한 계루부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계루부를 제외한 4부의 명칭에는 '나(那)' 또는 '노(奴)'자가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는데, '나'는 강가 혹은 산간 계곡에 자리잡은 지역의 집단을 나타내는 단어로 내(內), 노(奴), 양(壤) 등과 통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기록에는 위의 4부 명칭 외에도 '조나(藻那)' · '주나(朱那)' 등 '-나(那)'로 지칭되는 집단들이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의 초기에 중심지인 압록강 중상류와 그 지류인 훈장[渾江] 유역에 '-나'로 지칭되는 여러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집단 사이에서 정복 혹은 느슨한 연맹 등으로 상호 통합해가면서 태조왕 대를 전후하여 고구려 사회가 5부로 형성되어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계루부만은 ‘나’자가 이름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계루부는 처음부터 압록강 지역에 자리 잡고 있지 않았던 부여계 유이민 주몽(朱蒙)을 대표로 하는 집단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건국 이후 5부의 유력자들이 핵심 지배층을 형성하면서 국가를 운영하였고, 당시 정치권력은 국가 전체를 통괄하는 계루부 왕권의 영도력과 나부의 자치권이라는 2가지 축을 중심으로 유지되었다. 즉, 고구려 초기의 왕은 정치권력의 정점에 있는 국가 전체의 대표자로서 전쟁이나 외교, 무역 등과 같은 대외 교섭권을 장악하면서 나머지 4부를 통제하였고, 반면 각 부는 계루부 왕권의 통제를 받는 동시에 그와 구별되는 별도의 공간에 위치하면서 독자적 관원 조직을 바탕으로 일부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한편 각 부의 유력자들인 대가(大加)들은 회의체인 '제가 회의(諸加會議)'에서 국정의 주요 사안을 논의하였다. 또한 계루부를 비롯하여 각 '나부(那部)'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국중대회(國中大會) 동맹(東盟)에서 각 나부의 대표들은 계루부 왕실의 시조를 고구려 전체의 공동 시조로 받아들이고, 계루부 왕권에 대한 복속을 약속하는 의례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변천사항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오부 [高句麗五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5개의 부족 연합으로 고구려가 시작하여
고구려 초기 5부가
나중에 행정단위 5부가 된 것입니다.
22담로는 무령왕때 파견한 지방관이라고 보시면 되구요 백제 5부 5방은 성왕때 변경한 중앙 및 지방 행정체제입니다. 경기도 충청도 이런것처럼요. 고구려 5부는 완전 초기에 5개의 주요 부족들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구려의 행정 제도로 고구려는 원래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 다섯 부족이 연합한 연맹 왕국으로 출발했으며 이들 5부는 고구려 형성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제 9대 왕인 고국천왕은 이러한 5부의 부족 명을 없애고 동, 서, 남, 북, 내부로 명칭을 바꾸었고 이는 부족의 독립성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조치였습니다.
이들 다섯 부족의 연합은 지방 행정에도 반영되어 고구려는 전국을 역시 동, 서, 남, 북 , 내부의 5부로 나누어 통치, 지방 5부의 장관은 욕살이라 했으며 관리와 군대를 거느렸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구려 초기 국가 운영의 주축이 된 5개의 단위 정치체를 일컫습나다. 『삼국지(三國志)』주1 등 중국 문헌에는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 등 5개 '부(部)'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비류나부(沸流那部), 연나부(椽那部), 환나부(桓那部), 관나부(貫那部) 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왕을 배출한 계루부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계루부를 제외한 4부의 명칭에는 '나(那)' 또는 '노(奴)'자가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는데, '나'는 강가 혹은 산간 계곡에 자리잡은 지역의 집단을 나타내는 단어로 내(內), 노(奴), 양(壤) 등과 통합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기록에는 위의 4부 명칭 외에도 ' 조나(藻那)' · ' 주나(朱那)' 등 '-나(那)'로 지칭되는 집단들이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의 초기에 중심지인 압록강 중상류와 그 지류인 훈장[渾江] 유역에 '-나'로 지칭되는 여러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집단 사이에서 정복 혹은 느슨한 연맹 등으로 상호 통합해가면서 태조왕 대를 전후하여 고구려 사회가 5부로 형성되어 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편 계루부만은 ‘나’자가 이름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계루부는 처음부터 압록강 지역에 자리 잡고 있지 않았던 부여계 유이민 주몽(朱蒙)을 대표로 하는 집단이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고구려는 건국 이후 5부의 유력자들이 핵심 지배층을 형성하면서 국가를 운영하였고, 당시 정치권력은 국가 전체를 통괄하는 계루부 왕권의 영도력과 나부의 자치권이라는 2가지 축을 중심으로 유지되었습니다. 즉, 고구려 초기의 왕은 정치권력의 정점에 있는 국가 전체의 대표자로서 전쟁이나 외교, 무역 등과 같은 대외 교섭권을 장악하면서 나머지 4부를 통제하였고, 반면 각 부는 계루부 왕권의 통제를 받는 동시에 그와 구별되는 별도의 공간에 위치하면서 독자적 관원 조직을 바탕으로 일부 자치권을 행사하였습니다.
한편 각 부의 유력자들인 대가(大加)들은 회의체인 ' 제가 회의(諸加會議)'에서 국정의 주요 사안을 논의하였습니다. 또한 계루부를 비롯하여 각 '나부(那部)'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국중대회(國中大會) 동맹(東盟)에서 각 나부의 대표들은 계루부 왕실의 시조를 고구려 전체의 공동 시조로 받아들이고, 계루부 왕권에 대한 복속주5을 약속하는 의례를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부(部)'는 고구려 초기의 국가 구조와 정치 체제를 이해하는 데에 핵심 요소가 됩니다. 『삼국지』에는 비류부에서 계루부로의 왕실 교체가 '부'를 매개로 단행된 것으로 서술하였고, 정치체제의 형성에서도 부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동북아시아 여러 국가와 족속에서 사용된 부의 용례는 대부분 당대에 스스로 사용하였다기보다는 중국 왕조의 입장에서 규정해 놓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의 경우 '부'와 함께 사료에 등장하는 '본유오족(本有五族)'이라는 표현에서 '족(族)'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등에 유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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