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초요갱이란 인물에 대해서요
조선시대 초요갱은 아주 재능과 미모가 비운의 삶 덕분에 더 빛난 인물인데요
이름이 너무 특이해서 궁금해집니다.
그녀의 이름인 초요갱은 본명인지요?
아니라면 누가 지어준 것이며, 이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초요갱'은 조선왕조실록에 16차례나 등장한 기생의 이름입니다.
세종대왕의 세 아들들이 사랑했던 여인으로 평원대군, 계양군, 화의군이 모두 그녀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다가 유배를 간 왕자도 있었다는데요. 초요갱은 역사적인 순간, 극적인 순간에 여러 차례 실록에 등장하며 조선을 흔들었던 실제 역사 속 화제의 인물이었습니다.
궁중 악사 박연의 수제자로 궁중악의 유일한 전승자였던 초요갱은 뛰어난 재능과 미모가 가혹한 운명과 만나며 예술적 재능이 빛나는 예인(藝人)으로 살지 못하고 실록에 이름을 올리는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했던 비운의 기생이었습니다.
"지금의 명나라가 있기 전 그러니까 당나라보다 더 훨씬 앞선 시기인 초나라에 영왕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 영왕이 사랑했던 여인이 허리가 가늘고 아름다웠다고 하더구나. 그 이후부터 사람들은 허리가 가늘고 아름다운 여인을 가리켜 초요(楚腰)라 불렀단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글자는 미녀 갱(妔) 자를 써서 '초요갱'이라 지었다."
허리가 가는 초나라의 미녀를 닮은 조선 전기 최대의 스캔들의 주인공 '초요갱'의 이름이 그렇게 붙여진 것인데요.
사실 초요갱이라는 기생이 있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기생이라 하면 '황진이'가 가장 유명할 듯싶은데요. 누구나 다 아는 기생 황진이는 조선왕조실록에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초요갱은 무려 열여섯 번이나 그 이름을 올렸습니다.
우리는 잘 몰랐던 기생 초요갱,
그럼에도 조선의 역사에 너무도 자주 등장했던 기생 초요갱!
도대체 그녀는 누구였고,
도대체 그녀는 왜 조선실록에 등장했던 것일까요?
초요갱은 원래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어느 양반 댁의 첩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안이 역모와 연관되어서 관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역모에 관련되어 망한 집안의 여인들은 보통 노비가 되기 마련이었는데 초요갱은 춤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던 덕분에 노비 대신 관기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예인의 운명을 타고난 초요갱이 평원대군과의 만남을 통해 왕실과 연을 맺으면서 정치사에 휘말린 채 뒤틀어져 버린 인생이 시작됩니다.
처음 초요갱에게 빠져버린 왕자가 평원대군 이임이었는데요. 세종대왕과 소헌왕비 사이에 태어난 일곱 번째 아들인 평원대군 이임은 인품도 훌륭하고 총명하여 세종과 조정 대신들에게 사랑을 받는 대군이었답니다.
평원대군은 초요갱을 첩으로 삼고 글도 가르쳐 주고 나라에서 만든 춤도 가르치며 아꼈다고 하는데요.
그런 평원대군이 19세의 나이에 천연두로 사망하게 되면서 초요갱은 또 과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과부가 된 초요갱에게 다가온 세 번째 남자는 세종대왕의 아들 중 한 명인 '화의군 이영'이었습니다.
화의군은 세종대왕과 영빈 강 씨의 아들로 평원대군과는 이복형제인 관계인데 제수씨인 초요갱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화의군은 초요갱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했고 그 마음에 감복한 초요갱과 깊은 연인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과적으로 화의군과 평원대군 두 왕자들이 한 여자와 깊은 관계를 맺은 패륜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본래 죄명이 없었으나 이영과 초요갱은 간통 사건으로 죄를 받았고 무인 등은 사사로이 모였기 때문에 죄를 받았으니 그 죄명을 드러내어 사뢰지 아니한 바가 아니므로 모두 죄명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초요갱은 금수와 다름이 없으므로 족히 책할 것도 못되나 그러나 세종조에 새로 제정한 악무를 홀로 능히 전습하였고 다른 사람은 이를 아는 자가 드무니 고향의 고을에 내칠 수가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초요갱에 관한 글입니다.
단종 3년 1455년 화의군 이영이 금성대군 이유의 집에서 무사들과 함께 활쏘기 경연을 하며 잔치를 벌였는데 수양대군이 이를 반역을 도모하는 군사훈련으로 몰며 문제가 시작된 것인데요.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화의군과 금성대군을 역모죄로 처벌할 것을 요구하자 단종은 이를 거부했고 수양이 재차 화의군을 간통으로 몰아 처벌할 것을 몰아붙인 것입니다.
결국 화의군 이영은 제수씨와 간통한 죄로 유배를 가야 했고 초요갱은 곤장 80대의 중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초요갱은 형벌을 대속한 덕분에 직접 곤장을 맞지는 않고 한양에 머물러 살며 조용히 잊히는가 싶었는데 세조 3년에 또다시 사고가 터집니다.
세종 말년 좌의정을 지냈던 신개의 막내아들이자 수양대군의 세조 즉위를 도왔던 인물 '신자형'이 초요갱에게 완전히 푹 빠져버려서 본처를 내쫓아버리고 안방에 들이 앉힌 것입니다.
조강지처를 버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신자형은 관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버렸는데요.
엎친 데 덮친다고 이번에는 신자형의 7촌 조카뻘인 '안계담'이 초요갱을 탐하려고 신자형의 안방까지 들이닥쳤고 초요갱을 찾지 못한 안계담이 화가 나서 신자형의 노비들을 마구 구타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초요갱'에게 미친 남자들의 쟁탈전에는 왕실에서 미관말직까지 귀천의 구별이 따로 없었던 것인데요.
남자들이 문제였던 것일까요 아니면 초요갱이 문제였던 것일까요?
사실 초요갱은 기녀이기 이전에 뛰어난 예인이었고 궁중 악사 박연의 수제자였습니다.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궁중 무용의 유일한 전수자로 '악적'에 올려진 '여악'이었으니 세조 때에는 궁에서 연회가 있을 때마다 궁중 악무를 추곤 했다는데요.
이번에는 화의군 이영의 동복동생인 '계양군 이증'이 초요갱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세조는 몹시 화를 내며 "동복형이 취한 형을 어찌 서로 간음하는가"라며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계양군은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며 자신은 초요갱과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고 우긴 후 궁을 나왔다고 하는데요.
이날 실록의 기록에는 계양군이 세조에게 혼쭐이 났음에도 바로 그날 밤 초요갱의 집에서 그녀와 동침을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초요갱에 푹 빠져 살면서 허구한 날 술을 마시던 계양군은 나이 40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남이 장군을 비롯한 세조의 측근 세력들이 예종의 왕위에 위협이 된다고 하여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는데요.
초요갱은 이때도 등장합니다.
예종 1년의 실록에 '난신의 첩 초요갱'이 나오는데요.
이때 고위 관리의 첩이었던 초요갱도 함께 축출됩니다.
그리고 다시 초요갱이 평양 기생으로 등장을 하는데요.
세조가 사망한 지 얼마 안 되는 국상 기간 중에 평안도 도사인 '임맹지'가 초요갱과 간통을 했다고 고발을 당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끝으로 '초요갱'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실록에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초요갱은 총 16 차례나 그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기록을 세운 것인데요.
초요갱을 만난 남자들은 모두 그 끝이 좋지 않았고 초요갱은 자신의 뜻에 상관없이 '요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역사의 굴곡 속에서 초요갱 개인은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권력 있는 남자들에 의해서 가혹한 운명에 스러져간 비운의 여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유교를 중시하던 조선 시대에 '예악'은 유교의 주춧돌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왕실이 주관하는 연주와 노래, 춤을 포함한 모든 음악을 총괄한 곳이 '장악원'이었는데요.
장악원 소속 여악은 조선 최고의 만능 엔터테이너들이었습니다. 악기를 다루고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울 뿐 아니라 시와 글에 능해 교양인으로 대우받는 특수 계층으로 자연스럽게 '예능 기생'이 되어 사대부 지배 계층의 여흥과 탈선 행각에 이용되는 폐해가 있었습니다.
선비의 낮 문화가 과거와 관직 중심이라면 그 선비들의 밤 문화는 노비와 기생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과거제도와 함께 조선시대 양반 사회를 유지한 기생 제도의 핵심이 조선의 최고 예인들을 양성한 장악원이었고 장악원이 음악 기관이 아니라 기생 양성 기관으로 변질된 슬픈 역사의 한 장면이 조선 최고의 팜므파탈, 전설의 기생이 되어버린 초요갱의 실록 등장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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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요갱은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 왕이 가느다란 허리를 좋아해서 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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