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쇄국정책을 고수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조선말기에 조선은 쇄국정책을 실시하는데 서양과의 격차를 보게되면 받아들이고 배워야하는데 쇄국정책을 통해 간신히 국가가 연명하는 수준으로 국정을 운영하다 결국 일본에 나라를 뺏기는 결정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중국과 일본 두 나라만의 사대교린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조선말기에 이르러 천주교가 유입되고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본격적으로 문호개방을 요구해왔지요. 천주교 선교사들의 선교수단으로 교육,학문,예술방면까지 광범위하게 포교활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군사적 유입은 아니었으나 기존의 주자학의 신념체계를 흔들어 놓는 큰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적 침투는 주자학적 사상에 젖어 있는 조선 왕조의 정책 결정을 맞고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으며 19세기에 들어와서 서구 열강들은 제국주의로 약소국가의 영토를 침범하고 아시아의 제국에서도 침략정책을 감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서구 세력의 군사, 종교, 경제적 침투는 조선인들에게 자기 보존에 대한 위기의식을 고조시켰습니다. 이 상황에서 조선 왕조의 대응은 서양제국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신 문물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외세의 침투를 적극 저지하느냐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이에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선택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쇄국정책의 주 목적은 서양 열강으로부터 우리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서양 열강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변화하는 세계 정세에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는 한계도 분명하였습니다. 신미양요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는 승리일 수 있으나 군사적으로는 참패한 전쟁이었습니다.
1866년(병인년)에 만든 척화비를 1871년(신미년)에 전국적으로 세운 것은 위기의식의 발로였습니다. 병인양요에서는 승리하여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으나 신미양요는 그렇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신미양요 이후 오경석 등의 개항가가 출현하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서양의 침략을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활용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화이관에 입각한 강경한 배외적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세계 정세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어렵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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