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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팥소보로크림빵
단팥소보로크림빵23.08.15

안중근의사 조력자 최재형 선생은 어떤분이었나요?

중국의 하얼빈역에서 일본수괴 이토히로부미를 총으로 저격사살한 안중근의사를 뒤에서 조력하신 최재형선생은 어떤분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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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15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재형(崔在亨, 1860년 8월 15일[1] 조선 함경도 경원 출생 ~ 1920년 4월 7일 러시아 SFSR 프리모르스키 지방에서 별세)은

    조선의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러시아 제국의 군인입니다.

    군수업으로 부를 쌓았으며 항일 투쟁을 지원하였습니다.

    최재형은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항일투쟁을 위해 값지게 사용하였습니다. 연해주에 온 류인석이 13도의군을 조직할 때 의병들의 총기 구입 등 무장을 도왔다. 옛 소비에트 연방이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사용할 정도로 성능이 뛰어난 소총으로 무장시킨 것입니다.

    동의회는 러시아의 모든 항일의병 세력을 단결시켰고, 러시아 국경의 일본군 초소와 소규모 부대들을 격파하고, 많은 탄약과 소총을 탈취했다. 당시 일본군은 전사자 40여명에 달했으나, 의병들은 부상자가 불과 4명이었습니다.

    결국 의병들의 러시아 활동 사실을 파악한 일본은 제정 러시아를 압박했고, 러시아 국적의 조선인 청년의 징집, 무기 수거 등으로 의병 활동을 방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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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러시아의 세베리아 지역에서 활동한 대만민국의 독립 유공자 입니다. 러시아식 이름은 초이 표트르 세묘노비치(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입니다. 그는 러시아에서 교육받은 최초 조선인 이기도 했습니다. 하급 선원, 무기 공장 노동자 등 각고의 노력 끝에 1900년대 초 러일전쟁으로 인한 특수로 군수 산업 분야에서 큰 돈을 벌어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연해주 굴지의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성실하고 유능해 많은 러시안인이 최재형에게 통역, 도로·막사 공사 하청, 식료품 등 군납을 맡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큰 자금을 바탕으로 독립군의 지원금등을 지원 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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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준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본 수괴 이토히로부미를 저격사살한 사건에서 최재형 선생님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최재형 선생님은 대한독립운동가로서 안중근 의사와 함께 활동했던 인물 중 한 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나 조력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없어서 명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최재형 선생님은 대한독립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로, 조선총독부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며 독립을 위해 힘썼던 분들 중 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의 활동과 업적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자세한 정보를 찾기 어렵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종종 비밀스럽게 활동하고 기록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신다면 관련 역사 자료나 독립운동사 전문 서적을 참고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답변에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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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재형은 1860년대 말 고려인 최초의 이민으로, 함경도 노비 출신이었다. 그는 러시아 상선 선장의 도움으로 러시아 교육을 받은 최초의 고려인이기도 했다. 하급 선원, 무기 공장 노동자 등 각고의 고생 끝에 1900년대 초 제정 러시아와 일본 제국의 전쟁으로 인한 특수로 군수 산업 분야에서 큰 돈을 벌었다. 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 연해주 굴지의 거부가 되었다는데,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성실하고 능력있어 러시아인들이 모두 그에게 통역, 도로 및 막사 공사 하청, 식료품 등의 군납을 맡겼다고 한다.



    최재형은 저의 재산과 능력과 기회를 공동체에 바치며 고려인들의 존경을 받는 존재였다고 한다. 내륙의 한인들에겐 소, 돼지, 닭 등을 길러 군납할 수 있도록 했고, 슬라뱐카 등 해안가 한인들에게는 연어를 잡아 살과 알을 납품하도록 했다. 마을에는 학교와 공원을 세웠다. 그런 최재형을 러시아 정부는 도헌(지방 정부 시장)으로 추천했고, 연추 읍민들은 쌍수로 환영했다. 한인들이 그를 어찌나 존경하고 따랐는지, 1907년 연해주로 건너온 안중근은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기억했다.



    동포들의 권익 뿐만 아니라 조국 독립을 위해 최재형은 물심양면 상해임시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 및 독립 운동 특히 무장 투쟁의 정신적 지주이자 자금원으로 활약하였다. 1908년 최재형은 해외 최대의 독립 운동 단체인 동의회(총장 최재형)를 창립했다. 동의회는 최재형이 내놓은 1만 3천 루블, 이위종의 부친(이범진 전 러시아 공사)이 전해온 1만 루블, 최재형과 안중근이 모금한 6천 루블을 기금으로, 6월 이범윤 총대장에 안중근을 참모 중장으로 한 연추 의병을 창설했다. 연추 의병은 7월부터 국내의 홍범도 부대 등과 연합 작전을 펼쳐 접경 지역의 일본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9월 안중근의 실수로 영산 전투에서 대패했다.



    대패 이후 최재형은 재정난으로 인해 폐간되었던 《대동공보(大東共報)》를 인수하여 재발행, 격렬한 논조로 일제를 비판하고 독립 의식을 고취하였다. 안중근도 여기에서 근무하며 때를 기다리도록 했다.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척살 거사도 최재형의 후원으로 성사됐다. 이를 두고 안중근이 자신의 상관이자 조선 8도 독립 운동을 총괄한다고 주장한 김두성이 이 사람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다.



    조선의 병탄 이후 러시아는 항일 운동을 더 강하게 탄압했고 대동공보도 폐지되었다. 당시 연해주는 망명한 독립 지사의 집결지였는데, 최재형은 점진적 온건 투쟁 노선을 취하며 이들과 연해주 한인을 망라한 단체를 조직했다. 한인 동포에게 실업을 권장하고 일자리를 소개하며 교육을 보급하는 것을 표방한 권업회였다. 회장 최재형, 부회장 홍범도 체제로 출범한 권업회는 1914년 강제로 해산당할 때 회원이 무려 8579명에 이르렀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최재형은 또 선택해야 했다. 그에겐 조국만 있을 뿐 이념이 없었다. 일본이 반혁명군을 지원하고 있었기에 일본에 맞서 싸우기 위하여 혁명군과 함께 싸우길 택했다. 1918년 10월 말, 한인 사회당 간부인 이동휘, 김립, 이인섭은 하바로브스크에서 몸을 피해와서 니콜스크 - 우수리스크 동쪽인 한인 농촌에서 회합을 하였다. 당시 홍범도는 솔밭관 최의관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홍범도를 지도자로 해서 빨치산 부대를 조직했다. 이 계획을 추친하기 위해 한인 사회 지도자인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같은 사람들에게 몰래 찾아가서 자금 지원을 요청해서 그들은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런 적극 지원은 일제군의 첩보에 걸렸고, 이로 인해 최재형은 일제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19년 망국 이후 신한촌에서 가장 먼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대한 국민 회의'라는 임시 정부가 세워졌다. (상해 임시 정부보다 한달 빠른 시점) 대표는 헤이그 밀사의 정사(正使)였던 이상설이었고, # 이 임시 정부를 재정적으로 이끌었던 인물도 최재형이다. 그는 1920년 청산리 전투 & 봉오동 전투에 참여한 독립군들에게 체코와 러시아제 기관총 등 무기를 구입해 공급하며 승리를 견인하기도 했다.



    일본군은 1920년 우수리스크를 급습, 연해주 4월 참변을 일으키며 최재형을 제일 먼저 즉결 처형했다. 최재형은 몸을 피할 수 있었으나 피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사라지면 가족들이 고통당할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엄마와 언니들은 아버지에게 빨치산 부대로 도망가라고 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내가 도망치면 너희 모두 일본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것이다. 나는 살아갈 날이 조금 남았으니 죽어도 좋다. 너희들은 더 살아야 한다.’ … 다음날 새벽 열린 창문으로 일본군에 끌려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다섯째 딸 올가의 회상) 최재형은 왕바실재 산기슭에서 동지 김이직과 엄주필 등과 함께 학살당했다.


    1962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우수리스크에 위치한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옛집이 독립운동기념관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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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어제 다큐멘터리를 봤는데요, 참 훌륭하고 기억되어야하는 어르신입니다.

    "블라디보스톡의 페치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선생은 백화점을 갖고 있을만큼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그많으누재산을 동포의 교육과 독립운동에 다 사용하셨다고 합니다. 안중근의사의 뒤를 봐준것도 유명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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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재형 선생은 러시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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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명 재형(在衡)·도헌(都憲). 러시아 이름은 뻬돌쏘오·최뻬찌카. 함경북도 경원 출신이다.


    9세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노우키에프스크[煙秋]에 이주하여 러시아에 귀화하였다.


    러시아 군대의 어용상인(御用商人)으로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되었고, 이후 관리가 되어 두 차례에 걸쳐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러시아 황제를 알현, 5개의 훈장까지 받았다.


    노우키에프스크 도헌(都憲)이 되어 연봉 3,000루블을 받게 되자 은행에 예금, 그 이자로 매년 교포 유학생 1명씩을 페테르부르크에 보내 유학시켰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 해군 소위에 임명되어 경무관부속 통역관으로 활약하는 한편, 남부소집회감독(南部所集會監督)으로 러시아에 귀화한 교포들을 규합하여 항일전에 참전하였다.


    1907년 8월 군대 해산을 계기로 해산 군인 다수가 러시아의 노우키에프스크로 모이자 이들에게 군량과 군자금을 제공하는 한편, 이범윤(李範允)으로 하여금 거사하게 하였다. 1908년 3월에는 해이그특사였던 이위종(李瑋鐘)이 군자금 1만 루블을 가지고 와서 군사의 사기를 높였다.


    이를 계기로 다음 해에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범윤과 같이 의병 600명으로 의진을 정비하고, 이 해 7월 대장이 되었다. 정예병 200여 명을 이끌고 함경북도 경원의 신아산(新阿山)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켰으며, 회령의 영산(永山)에서 일대 격전을 치르고 노우키에프스크로 돌아왔다.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大東共報)』가 재정난에 빠져 폐간되자 이를 인수하여 재간행, 교포의 계몽과 항일사상 고취에 힘쓰고 일제의 침략 만행을 통박하는 등 언론투쟁도 전개하였다. 또한 노우키에프스크에 한인중학교(韓人中學校)를 설립하고, 이범윤으로 하여금 2세 교육에 힘쓸 수 있도록 한족민회(韓族民會)를 조직케 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의 윤능효(尹能孝) 집에 동지 10여 명을 모아 놓고 재러한인대표로 2명의 위원을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파견할 것과, 그 여비로 5만 루블을 거출할 것을 의결하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담당하여 활약하였다. 이 해 4월 10일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제1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초대 재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노령(露領)을 근거로 계속 활약하였다.


    1920년 4월 일제가 시베리아로 쳐들어오자, 재러한인의병을 모두 모아 시가전을 벌이던 중 김이직(金利稷)·황경섭(黃景燮)·엄주필(嚴周珌) 등과 같이 잡혀 살해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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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60년 8월 15일생, 함경도 경원에서 태어나, 1869년 아버지 손에 이끌려 러시아 진신허에서 살면서 형수의 심한 구박으로 굶기를 밥먹듯하여 11살에 가출하여 포시예트 항에서 탈진하여 쓰러진 최재형을 러시아 선장이 발견하여 집으로 데리고 가서 보살피고 학업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1871년부터 1877년까지 선장부부와 상선을 타고 세계를 돌며 무역을 배웠고, 폭넓은 사고를 가진 지식인으로 성장했습니다.

    군수업을 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고, 조선인의 경제적 자립을 도왔습니다.

    연해주 연추에서 한인마을의 정교회 학교를 32개나 세웠고,

    이후 일본의 야욕을 간파하고 항일운동에 뜻을 두면서 1907년 안중근은 해외망명을 통해 러시아에서 최재형을 만납니다.

    1908년 최초의 독립단체 동의회를 조직하여 총장이 됩니다.

    최재형은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항일투쟁을 위해 무기 구입을 지원하면서 러시아의 의병세력을 단결시키고 일본군 부대와 전쟁을 하기도 합니다.

    이후 이토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안중근은 최재형의 집에서 사격연습을 합니다. 히로부미를 죽이고 러시아 법정에서 안중근이 재판받도록 주선하여 준비하였지만 일본이 불법재판으로 안중근을 처형하자 안중근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안중근의 처자들을 보호하였습니다. 이후에도 권업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의 음모에 따라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어 여러 활동을 하였지만 말년은 재정난을 겪으면서 우수리스크의 한 초라한 집에서 지내다가 일본 헌병대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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