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규모 및 역사적 의미에대해 궁금해요
부산에서 조선통신사 행사를 재연하는 축제를
본적이 있는데 문득 조선통신사가 시작된 계기 및 규모 그리고 어느정도 지속되었고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429년(세종 11) 교토에 파견된 정사 박서생(朴瑞生)의 사절단이 최초의 통신사였으며, 이후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총 12회에 걸쳐 통신사의 왕래가 이루어졌습니다. 통신사는 외교 사절 역할은 물론 조선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통신사의 파견 목적은 왜구 금지요청, 강화와 포로들의 쇄환, 일본국정 탐색, 막부장군의 습직(襲職) 축하 등이 있었으며,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요청에 따라 선조 34년(1601)에 손문혹·사명대사(유정) 등이 파견돼 일본의 동정을 살핀 바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진왜란 이전 무로마치 막부 시절 딱히 규칙을 정해놓지 않고 몇번 오갔고 오닌의 난 이후로 일본 전역이 전란에 빠지며 중앙 정부가 지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오우치 등 지방 다이묘가 따로 조선에 공물을 바치고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해 전국시대를 끝내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직후 일본 외교가 단절, 임진왜란 전까지는 사절단이 일본 각지로 70번 가량 방문했습니다.
1607년 고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시의 정원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임진왜란과 상관없다는 언급을 하며 먼저 국교 재개를 수차례 요구한 끝에 조선 조정이 이를 받아들여 국교를 재개, 이후 포로 교환 및 정보 수직 목적으로 3회에 걸쳐 사명당을 비롯한 회답겸쇄환사 라는 사절을 파견합니다.
조선에선 원수였던 일본과 화해하는게 달갑지 않았더라도 일본과 계속 사이 나쁘게 지내면 다시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과 후금이 갈수록 강성해지니 후방에 있는 일본과 좋게 지낼 겸 임진왜란의 전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력을 멸망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도쿠가와 입장에서 새로 집원하기 했으나 1615년 오사카 전투 이전까지는 도요토미 파벌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명분을 쌓을 필요가 있었고, 조선을 공격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조선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게 이득이었습니다.
에도 막부 시기 1811년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회답겸쇄환사가 3번, 통신사가 9번 파견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통신사는 조선 전기에도 파견되었지만 임진 왜란 직후 기유약조를 맺고 다시 교류하면서 1607년(선조40) 에도 막부의 요청으로 1811년(순조11)까지 12차례에 걸쳐 파견되었습니다. 파견 규모는 정사와 부사를 비롯해 수행원을 포하하여 한번에 300명에서 500명 정도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통신사란 조선 후기에 일본으로 보낸 외교 사절단입니다. 당시 어휘 통신은 국왕의 뜻을 전함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보통은 1607년 이후 조선이 에도 막부에 파견한 사절단만 가르키나 연구에 따라서는 조선 전기에 일본측에 파견된 사절도 포함시키기도 하며 실제로 실록을 찾아보면 태종 때부터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조선에 파견한 일본국왕국의 일본과 맞추기 위해 후대에 조선 통신사라고 부르고 있을 뿐 정확한 당대의 공식 명칭은 통신사로 조선 시대에 조선측이 스스로 사용한 적은 없으며 후에 교육을 위해 통신사 앞에 조선을 붙인 것입니다. 임진왜란으로 10년간 그쳤다가 1609년 도구가와 이예야스의 지속적인 요청으로 국교를 재개하였습니다. 그 후 에도 막부 시기인 1811년까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회담겸쇄환사가 3번 통신사가 9번 파견되었습니다. 한양에서 에도까지는 왕복 4000km로 5개월에서 1년이 걸리기도 하였으며 정사 부사 종사관 등 300-500명 규모로 파견했으며 평균적으로 400여명을 파견하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일본도 일본국왕사를 보내왔는데 이들은 한양까지 오지 않았고 부산 동래구까지만 왔습니다. 이는 임진왜란의 후유증으로 한양으로 오는 길을 익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시대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막부장군에게 보낸 공식적인 외교사절이다. 일반적으로 조선통신사라 한다. 명·조선·일본 간의 사대교린 관계에서 조선과 일본은 대등한 처지의 교린국으로서 상호간에 사절을 파견했다. 사절의 명칭은 조선측은 통신사, 일본측은 일본국왕사라 했다. 태종 때부터 통신사의 파견이 정례화되어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총 20회(조선 전기 8회, 조선 후기 12회)가 이루어졌다. 조·일 양국 간 우호교린의 상징이었지만 임진왜란 등 정세에 따라 변동을 겪었다. 외교만이 아니라 학술·사상·기술·예술 등 문화교류의 통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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