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고혹한 쇠똥구리
고혹한 쇠똥구리23.12.07

발해가 멸망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예전에 인터넷 기사에서 본듯한 기억이. 있는데 발해가 멸망한 이유가 백두산 화산폭발일수도 있다고 하던데 정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발해는 제 15대 대인선대 멸망을 길에 들어서 926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는 다양한 주장이 있습니다.

    첫째, 내부 분열입니다. 거란의 침입으로 단 3일만에 멸망하는데, 발해는 고구려인과 피지배층인 말갈인으로 구성된 민족 구성의 한계로 점차 분열이 생기고 국력이 약화되어 멸망한 듯 합니다.

    둘째, 오랜 평화기로 전쟁 대비가 미흡하였습니다. 평화가 지속되어 사치와 재정의 낭비가 군사적 약화를 초래하였을 것입니다.

    세째, 발해는 요동에 비해 평야 지대에 위치하여 천연 산성, 해자를 구축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네째, 백두산이 9~10세기 크게 폭발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9세기 화산 폭발이 민심 약화와 멸망에 영향을 줬을 것으로 분석합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발해와 같은 경우에는 내부 분열로 인하여

    국력이 쇠퇴하였고 이에 요나라의 침입을 받아 멸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선왕 사후 약 100여 년간에 걸친 발해 역사에 대해 뚜렷한 기록이 없어 발해 멸망을 상세히 다룬 요사의 기록을 고려하면 수도 급습설이 유력합니다.

    91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부족을 통일하고 대거란국을 건국, 이후 발해와 거란은 요충지인 요동을 두고 10년간 쟁탈전을 벌이게 되고 결국 발해가 소모전에서 패, 요동을 잃은 발해에선 당시 고구려인과 동맹관계였던 말갈이 이탈하기 시작합니다. 10년 간의 공방전으로 요동을 빼앗겼지만 발해는 924년 5월 요동을 공격해 탈환 후 거란인을 포로로 잡았고 925년 4월 요군은 발해의 신주를 먼저 공격해 요동 방어선으로 군사를 몰리게 만들었고 이는 12월까지 계속됩니다. 요는 발해가 요동에 방어선을 다진 것을 틈타 발해와의 무역로인 거란도를 통해 기습 공격했고 부여부를 3일만에 함락, 이후 발해의 혼란을 틈타 요의 군대는 수도 홀한성으로 직진해 함락시킵니다.

    요동지역을 둘러싼 전투는 요의 승리로 일단락되고 발해는 요동 지역의 전략적 이점을 상실하면서 경제, 군사상으로 큰 타격을 입습니다.

    비록 발해는 요동지역을 상실하나 아직 요에 충분히 대응할수 있는 국가로, 919년 요동을 병합한 요의 침입을 격파하고 924년 5월 발해가 거란의 요주를 공격해 함락시킨 후 거란인을 포로로 잡아 온 것은 발해의 군사력이 건재했음을 의미합니다.

    당시 국제적 환경은 몽골 초원의 위구르 제국의 해체, 토번 제국의 붕괴, 중원의 당나라의 몰락과 오대십국시대, 한반도가 후삼국으로 분열된 혼란의 시대였는데 이런 가운데 대인선은 군사적인 대응 뿐 아니라 외교적으로 요를 견제, 주변 국가와 결속을 맺어 침략에 대비합니다. 그러나 요사 본기 이심이라는 표현대로 924년 여름을 기점으로 발해 내부 문제가 발생, 이는 발해가 멸망 전부터 고려로 망명하는 발해인이 장군 등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귀화한 것입니다.

    발해의 이런 내부적 상황을 파악한 요는 전쟁 경험을 통해 발해의 방어 체계를 무력화 시킬수 있는 전술을 계획, 요동 방어선을 우회해 공격해 수도를 함락, 발해 유민들의 저항인 발해 부흥운동은 1116년까지 이어지나 실패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