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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5.18

몽골의 고려 내정간섭 기관인 다루가치를 폐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몽골은 진입하여 식민지로 만든 다음에 자신들의 내정간섭을 위한 관리인 다루가치를 두곤하였는데요 고려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다루 가치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다 다루가치를 폐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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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8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몽고의 관직으로서 각 관서(官署)의 장(長)을 칭함. 다루가치가 최초로 고려에 배치된 것은 제1차 몽고 침입 때의 일로 몽고는 군대 철수의 조건으로 서북면 지방 14개 성(城)에 72명의 다루가치를 두고 민정(民政)을 맡아 보게 하여 고려 관민과 불화가 잦았음. 원나라가 물러간 후에 소멸되었음.

    변천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에 다루가치가 설치된 것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232년(고종 19)이다. 이때에는 몽골의 1차 침입에 뒤이은 강화를 1월에 맺으면서 처음 고려에 72명의 다루가치가 개경 및 북계 지역에 파견된 시기이다. 하지만 고려가 같은 해 7월에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다루가치의 제거를 기도하여 대부분을 살해하였다. 이후 한 동안 다루가치는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 시기는 1250년대 후반에서 1260년까지이다. 1253년 7월부터 5차 침입을 이끌던 예쿠[也窟]는 11월 22일에 사신을 보내 다루가치를 설치하고 고려가 성벽을 허무는 것을 협상 조건으로 내걸었다.

    고려는 몽골이 내건 조건에 반대하였지만, 1258년에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결국 다루가치를 설치하는 조건을 수용하여 1260년(원종 1)에 쉬리다이[束里大]와 강화상이 고려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개경 환도에 미온적이던 김준 정권은 환도를 준비한다는 이유로 다루가치의 파견을 연기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몽골이 이를 받아들여 다루가치를 철수하였다.

    마지막 세 번째 시기는 1270년부터 1278년까지이다. 이 시기에 몽골은 고려국 다루가치를 개경에 상주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김방경 무고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충렬왕이 쿠빌라이주6로부터 본속(本俗)에 의한 지배라는 세조구제(世祖舊制)주3를 인정받았다. 이에 1278년에 다루가치가 고려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다루가치 [達魯花赤]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루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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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다루가치는 고려 후기에 몽골제국에서 정복지의 총독, 감독관으로 두었다가 지방장관으로도 사용된 직명이다. 고려에는 1232년(고종 19)에 처음 설치되었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한 후인 1270년부터 1278년까지 개경에 상주하였다. 1278년에 일어난 다루가치의 폐지는 충렬왕이 몽골의 쿠빌라이에게 요청하여 얻어낸 외교 성과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성과의 이면에는 부마가 된 충렬왕에게 더 이상 다루가치를 파견하는 것이 몽골의 관습상 불편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었는데 즉, 충렬왕이 몽골제국 황실의 구성원이 되었기 때문으로, 온전히 자주적 성과라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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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231년 몽골이 개경을 점령하고 철군하면서 설치한 다루가치가 내정간섭을 합니다.

    이에 대한 고려의 항거로 제2차 몽골 침입의 원인이 되었으며,

    1259년 고려의 태자가 돌아올 때에,

    충렬왕 초기에도 다루가치가 존속되면서 고려의 정치를 간섭합니다.

    충렬왕이 원나라 세조의 부마가 되어 신임을 얻게 되면서

    다루가치의 간섭을 견제할 수 있었으며,

    1278년(충렬왕 4년) 원나라에 친조(親朝)하면서 다루가치의 폐지를 약속받은 뒤

    다루가치는 완전히 철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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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다루가치는 '진압한다'는 뜻의 daru에 명사어미 gha와 '사람'을 가리키는 chi를 붙여서 '진압에 종사하는 사람'을 뜻하는 몽골어이다.


    몽골족은 정복지에 다루가치를 설치하여 통치했다. 고려에도 몽골이 침입한 초기부터 배치되었다. 처음 배치된 것은 제1차 몽골침입이 있었던 1231년(고종 18)이다. 몽골의 총지휘관인 살리타이가 철군하면서 서경(지금의 평양) 등 북계(지금의 평안도)에 배치하였다.


    〈원사 元史〉 고려전에 의하면, 이때 72명의 다루가치가 40여 개 성에 배치되었는데 이듬해 모두 고려인에게 사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다루가치가 배치된 성이 실제로는 14개였고 다루가치의 수도 훨씬 적었을 것으로 보며, 모두 살해되었다는 것도 당시 상황으로 믿기 어렵다고 한다. 이때 배치된 다루가치는 북계의 각 성(城)에 따로 두어졌던 것 같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고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이 결정되고 난 다음부터 몽골은 고려 왕경에 고려국사 전체에 간여하는 다루가치를 파견했다. 1270년(원종 11) 다루가치는 부(副)다루가치와 함께 파견된 이래 일정한 임기를 두고 계속 파견되었다. 이들은 원나라가 고려를 통제하고 감독하기 위해 파견한 관리였다. 따라서 원나라의 명령에 따라 내정간섭을 했으며, 고려에 나와 있는 원나라 관원과 고려인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을 해결하기도 했고, 원나라에 죄를 지은 고려인을 처단하기도 했다. 1278년(충렬왕 4)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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