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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건국한 혁명파 신진사대부는 통치체제를 정비해야 했습니다. 정통성과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하였지만 정비 과정에서 융통성이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외교 측면에서 나타납니다. 초기 정도전의 요동정벌론 등 명과 적대적이었으나 태종 즉위 이후 사대관계를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개국 공신을 계승한 15세기 관학파, 이후 훈구파는 자주적인 측면을 엿 볼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의 눈치를 보지않고 한글 창체, 칠정산 개발, 동국통감에 단군 기록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사림은 달랐습니다. 도덕과 의리를 중시하는 사림은 같은 맥락에서 명에 대한 존화주의를 강조했습니다. 예를들어 이이의 <기자실기>에서도 한족과의 관계 중시에서 엿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사림의 집권과 이후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단순히 사대를 넘어 '숭명사상'으로 심화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