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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3.30

경주 최부자집이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뭔가요?

경주의 최씨 집안이 조산 3대 부자로 유명합니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경주 최부자집에 대한 일화들을 이야기 했었는데요.

가지고 있는 땅이 여의도 면적만 했다고 하던데 경주 최씨 집안은 어떻게 이렇게 부자가 될 수 있었던건가요?

양반 집안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나요?

조선에서는 상업을 천하게 여겼던 걸로 아는데 어떻게 부자가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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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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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30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최부잣집은 17대손 최진립 선생에서부터 시작된 것.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전쟁의 의병이셨던 최진립 선생은 69세의 나이로 전쟁터에서 전사하시고 참전한 공으로 토지를 하사받습니다.

    그리고 이 땅으로 부를 축적한 방법은 바로 "모내기"였는데, 더 중요한 것은 당시 소작인과 지주가 3:7 배분이었던 반면 최부잣집은 소작인들이 자연스레 더 열심히 농사를 짓게끔 5:5 배분으로 맞춰 오히려 생산량은 증대되고 수익 또한 증가한것입니다.

    요즘 대기업들도 하지 않는 "소작인들과 상생하는 방법"을 항상 찾았다는 최부잣집.

    그리고 "부자는 3대를 가지 못한다"는 말을 깨고 12대까지 이어진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최부잣집에는 가훈이 여섯 가지가 있었으며 그 중 "사방 백리 안에 굶는 사람 없게 하라"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보통 명문가에서는 더 높은 관직을 하려고 난리일 텐데 알고 보니 집안을 지키기 위한 지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조선 3대 부자 중 최부자댁만 유일하게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무려 400년간 내려온 전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것이죠.

    찐명문가다운 면모를 보인 부분이라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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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부자는 엄격한 가훈을 세워 지키게 하였습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게 하라 등등이었습니다.

    만석지기 최부자 가문은 1대 최진립(1568-1636)에서 전재산을 영남대 설립에 기부한 12대 최준(1884-1970)까지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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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당시에는 부자 3대를 못 간다는 속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1대의 검소함과 겸손함을 져버리고 아무 노력없이 부를 물려받은


    자녀들의 허랑방탕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최부자는 엄격한 가훈을 세워 지키게 하였습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게 하라 등등이었습니다.



    만석지기 최부자 가문은 1대 최진립(1568-1636)에서 전재산을 영남대 설립에 기부한 12대 최준(1884-1970)까지를 말합니다.



    1947년에 대부분의 재산을 영남대 설립에 기부하고, 부자 가문의 막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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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 했던가. 덕을 쌓은 집안에 복이 있듯,

    최부잣집은 부를 베풀수록 나날이 번성했다. 부를 베풀고, 민심을 얻고,

    그 민심이 더 큰 부를 불러들이는 부의 선순환. 그것이 바로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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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경주 제일가는 부자가 있었는데 어느날 아침 부자가 사랑에 앉아 있는데 칠 팔세 되어 보이는 소년이 밥을 얻어먹으러 왔다. 그 관상이 예사 사람이 아님을 짐작하고 소년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는데 소년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다만 어릴적에 누군가 지나가는 소리로 '최 아무개 자손이 저렇게 되었구나' 라고 하는 소리를 들어 성이 최가라는 사실만 알고있었다. 부자는 밥을 주는 대신 자신의 집에 있을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부자는 그 날부터 그 소년에게 '영'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자식처럼 키우기 시작했다. 영은 매우 영특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다. 부자는 영이 열일곱살 먹은 해에 자손이 없는 오촌 친척에게 양자를 보냈다. 당시 대원군이 불에 탄 경복궁을 재건하려고 하려던 때에 과거를 시행했는데, 그 시험에 최영이 급제했다. 대원군이 그 이름을 묻자 영은 이영이라고 성을 바꿔 말하였다. 대원군은 성도 국성에 재주가 가히 천재라고 생각하여 그를 크게 기용하기로 하고 경복궁 재건 자금을 모으는 직책을 영에게 맡겼다.

    그는 명단을 작성하면서 자신이 최가라는 사실이 탄로날까 자신의 고향인 경주에 어마어마한 액수를 상납하라고 하였다.

    조공이 다 모이자 터무니없는 액수를 매겼던 경주에서만 그 할당 조공이 다 모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직책의 장이 이영을 불러 직접 경주에 찾아가 그 원인을 찾게했다. 최부자는 이영을 보고 깜짝 놀라 아는 척을 하자 이영은 최부자를 보고도 언제 봤느냐며 강짜를 놓았고 이를 본 장은 뭔가 눈치를 채고 이영을 내보낸위 최부자의 사정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는 이영을 불러 대번에 목을 베었다.

    최부자가 재산을 모두 강탈당하고나서 가족들은 노상에서 살다시피하였다. 하루는 움막 밖에 한 걸객이 거의 아사 직전으로 쓰러져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죽으로만 살고 있던 최부자 가족이었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죽을 객에게 먹였다. 목숨을 건진 걸객은 ' 내 은혜를 갚을 수는 없고 집터 하나 잡아두고 갈 테니 그 곳에 가서살면 부자가 될것이오. 그리고 집에서 꼭 개를 키우되, 곧 삼족구가 태어나면 주인이 직접 밥을 주고, 주인이 죽는다면 그 후대라고 밥을 계속 주시오.' 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최부자는 걸객이 말한 자리에 오두막을 짓고 사니 과연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말한 대로 캐를 키웠는데 곧 삼족구가 한마리 태어나 역시 시키는 대로 최부자만 밥을 주었다.

    몇 해사 지나 어느날 유기장수가 오더니 온갖 잡물들을 다 사라고 행패를 부렸다. 이 행패를 참다못한 부자가 유기장수를 때리자 그만 죽어버렸다 . 결국 관가에 잡혀간 부자는 원님에게 애원을 했다. 그러자 원님은 '돌아가서 가문에 무슨 불상사가 있거든 삼족구를 풀어주라' 말하고 풀어줬다. 부자가 집에 돌아와보니 죽은 장수의 가족들이 몰려와 난리가 나있었다. 최부자는 원님의 말을 떠올리가 삼족구를 풀어줬는데 삼족구가 이리저리 날뛰더니 죽은 장수의 손자를 물고는 놓지 않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장수의 손자가 쓰러져 죽었는데 그 자리에는 너구리만 한마리만 죽어있었다. 원래 객이 전해주고 간 집터가 너구리터였는데 그곳에 집을 지어 너구리가 복수하려고 인간으로 변해 부자가족을 쫓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다행히 삼족구가 있어 그 화를 면하고 대대로 만석부자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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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주 최씨 집안은 조선시대에 세종대왕의 제왕실 벗이자 경숙왕후의 친척으로, 양반 집안 중에서도 지위가 높았습니다. 그러나 이 집안이 실제로 부자가 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인 19세기 초부터입니다. 이때 최씨 집안은 삼천포, 강릉, 울진 등에서 대규모의 토지를 보유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쌀과 오이, 호박 등을 대량 생산하여 서울과 부산 등의 시장으로 판매하였습니다. 이렇게 경주 최씨 집안은 거대한 생산기지와 유통망을 구축하여 큰 부를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경주 최씨 집안이 이렇게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경주 최씨 집안은 양반 집안으로서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집안의 조상들은 출신지가 충청도로, 이 지역의 상인 문화와 교류를 많이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경주 최씨 집안은 상업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의 농업 생산과 유통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상업활동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이를 위반하여 상업활동을 하는 가운데 경주 최씨 집안은 이를 위해 만주와 교류를 많이 하였습니다. 만주에서는 곡식 및 터재로를 대량으로 생산하였으며, 이를 경주로 수송하여 판매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경주 최씨 집안은 적극적인 토지 투자를 통해 대규모의 농업 생산과 유통을 구축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으며, 이후에는 이를 바탕으로 자회사를 설립하여 더욱 큰 성장을 이루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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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주 최부자는 경주에 있는 교동에서 3백년간 12대에 걸쳐서

    이웃과 함께 하는 가훈을 이어오면서 실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석이상은 사회에 환원하라,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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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조 최진립이 가문인 경주 최씨 가문이 17세기 초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약 300년 간 부를 이어온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12대로 대대손손 가훈을 지켜가며 부를 쌓았고, 나그네나 거지들 에게 돈을 나누어 주고 밥을 먹여주는 좋은 선행을 했다고 전해 집니다. 경주최씨 집안은 장사를 해서 부를 쌓은 게 아니라 땅이 만석이 넘는 부자 였습니다. 경주에서 12대 동안 만석꾼을 배출한 집이지요. 현재의 최부자댁은 교촌마을에서 5대 동안 정착하였지만, 최언경(1743~1840)이 1700년대 이곳에 터를 잡기 전에는 경주 최씨 파시조인 최진립 때부터 경주시 내남면 게무덤에 터를 잡고 7대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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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최부자의 1대는 최진립입니다. 2대 최동량은 많은 재산을 물려받고 큰 땅을 구입합니다.

    산부터 강까지 이르는 큰 땅을 산 후, 여기 전체에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아들 최국선은 둑을 세우고 옆에서 도우며 동반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최동량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땅을 쓰고 싶은 듯 하면, 소작료를 수확한 곡식의 반만 받고 중간 관리자인 마름도 두지 않았습니다.

    마름은 중간에서 소작료가 일꾼과 땅주인에게 잘 교류되는 지 검사관 역할을 맡았으나, 중간에서 소작료를 빼돌렸기 때문에 마름이 없는 것이 안전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최동량은 일꾼을 모아 그 큰 땅을 모두 일구었습니다.

    농사는 성공적이었고, 거름을 쓰는 시비법과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수확량을 크게 늘렸습니다.

    한편 그 얼마후 최동량은 세상을 떠나고 최국선에게 최부잣집의 3대째 자리를 내어 줍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최국선은 흉년이 들어 농민들이 쌀을 빌려간 것을 못 갚자 아들 앞에서 담보문서를 모두 없애고 죽을 쑤어 거지들에게 푸짐하게 나눠줍니다.

    배고픈 보릿고개 때에는 100석의 쌀을 베풀었습니다..

    ‘사방 백 리에 굶어 죽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최부잣집의 선행 덕분이었을까. 활빈당의 불길 속에서도 최부잣집은 살아남습니다.

    하지만 12대 최준에 이르러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는 신념으로 독립자금 마련에 재산을 내놓습니다.

    광복 후에는 교육 사업에 전 재산을 기부했습니다. 최부자가 12대, 300여 년으로 막을 내린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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