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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6.17

논개는 원래 출신이 기생인가요?

임진왜란때 활약한 논개는 기생을 가장한 스파이인가요 아니면 진짜 기생인가요? 물론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의인이니깐요

논개는 원래 출신이 기생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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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1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성은 주씨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입니다.

    전북 장수 임내면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데 출생일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후처입니다.

    임진왜란 때 최경회가 전사하자 일본군이 촉석루에서 벌이는 잔치에 참석해 일본군 장수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생 출신이라기 보다는 기생으로 위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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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논개는 유몽인의 어우야담에서 최초로 등장하고 조선 왕조의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는 논개 관련 기록이 없습니다.

    어우야담의 언급이 최초의 기록이라 주요 기록으로 전하기는 하지만 어우야담은 효시에 꼽힐 정도의 이야기 책이므로 정식 역사서로 , 야사집으로 많이 부족합니다. 다만 사서 기록이 없고, 이후 일화와 일치되는 점이 많아 이것을 주요 자료로 꼽으며 특히 어우야담은 선조 시기에 원본이 쓰여지고 200년이 지나 순조 시기에 활판본이 나왔으며 필사본이 30종이 넘어 이 책에 대한 연구는 조심스럽습니다.

    따라서 논개가 기생이었는지, 애초에 이런 기생이 실존했는지 역사적 확인은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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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기녀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빠져 산화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었다. 구전되어오던 그녀의 순국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라고 추정된다.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충성심에 감동한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 於于野談》에 채록함으로써 문자화되었던 것이다.

    한편 진주 사람들이 그녀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고 전하기 위하여, 그녀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그러나 그녀를 추모하는 지역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그녀의 순국사실이 누락되었다. 이는 유교윤리에 젖어 있던 일부 편집자들이 관기를 정렬(貞烈)로 표창함이 불가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집권사대부들의 편견 때문에 그녀의 애국충정은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부 사대부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진주성민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그녀의 의혼(義魂)을 위로하는 한편, 국가적인 추모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은 경종 이후의 일이었다. 진주성민들은 절의(節義)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 그녀의 의로운 행위는 마땅히 정부가 표창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진주성민들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1721년(경종 1)에 기녀의 신분으로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녀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

    이때 거론된 구체적인 포상방법은 봉작(封爵)을 내려주고 사당(祠堂)을 건립하여주는 것이었다. 최진한의 건의를 받은 비변사는 보다 확실한 인증자료의 제시를 요구하였다. 이에 최진한은 관민합동으로 〈의암사적비 義巖事蹟碑〉를 건립하고 난 다음 그 인본을 제출하여 자손의 급복(給復)에 대한 특전을 허락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는 비록 진주지역민들의 숙원이었던 논개에 대한 봉작과 건사사액(建祠賜額)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그녀의 순국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 되었으며, 의기가 논개를 지칭하는 공식호칭이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자손에 대한 급복의 특전이 베풀어진 20여년 뒤에 의혼을 봉안하는 사당이 건립되었다.

    1739년(영조 16)경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부근에 세워지고, 논개에 대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루어짐으로써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절차가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의기사는 그뒤 홍화보(洪和輔)·홍백순(洪百淳)·이지연(李止淵) 등이 여러 차례 보수하여 지금까지 촉석루(矗石樓)옆에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1868년(고종 5)에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명의 여기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의암별제는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의식절차만이 《교방가요 敎坊歌謠》에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제시되었다. 논개는 전라도 장수출신이며, 양반가문출신이고, 성은 주씨(朱氏)이며, 최경회(崔慶會) 혹은 황진(黃進)의 애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문헌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논개의 출신성분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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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논개가 기생으로 활동하면서 몸을 바쳤지만 기생이였다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서 양반들과 함께 의병활동을 한것으로만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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