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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6.10

조선 시대에 1차 예송논쟁 안 무엇으로 대립한 것입니까

조선시대 가는 수많은 당파와 당쟁으로 계속해서 국력을 소진 하였는데요 1차 예송논쟁으로 남인과 서인이 대립했다 이렇게 배웠습니다 1차 예송논쟁 이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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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Podiesi님 안녕하세요. 1차 예송논쟁은 조선 초기의 가장 중요한 사상적, 정치적 대립 중 하나로, 주로 15세기 중반의 세조와 예종 시기에 발생했습니다.

    이 논쟁은 불교와 유교 사이의 대립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불교를 비판하고 그 영향력을 줄이려는 유학자들과, 불교를 지지하거나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 간의 갈등이었습니다. 이 논쟁에서는 불교의 예송, 즉 승려들의 음악적 찬미가 유교의 예례에 적합한지 여부가 주요한 이슈였습니다.

    논쟁의 결과로, 유학파의 비판과 세조의 지지에 힘입어 불교의 향향(불교 음악)이 금지되었고, 이로 인해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불교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유교를 중시하는 사람들 사이에 깊은 분열이 일어나, 이후의 정치적 당파 싸움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 추가로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질문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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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10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현종대에 일어났던 두 차례의 예송은 효종이 종법적(宗法的) 지위에 대한 학자들 간의 인식 차이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즉 효종을 인조의 장자로 볼 것인가, 차자로 볼 것인가에 따라 자의대비(慈懿大妃, 조대비)의 복이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문제는 1645년(인조 23) 2월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6월에 인조가 적장손인 세자의 아들을 제치고 차자였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효종은 인조의 차자였지만, 종법에 의하면 차자도 대통을 계승하면 장자가 되는 규정이 있었으므로 그를 장자로 볼 여지가 있었습니다.


    서인들은 그를 차자로 인식하여 기년복을 주장하였고, 남인들은 그를 장자로 간주하여 삼년복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예송에는 16세기 이후 조선에서 예학이 크게 발달하였고, 서인 학자들이 예법의 보편성을 강조한 반면, 남인 학자들은 왕실 전례의 특수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두 차례의 복제 예송이 더욱 심각하게 전개되었습니다.

    효종이 서거한 이후, 당시 정권을 주도하고 있던 서인들은 계모(繼母)인 자의대비의 상복을 기년복으로 정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효종이 인조의 중자(仲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인 학자였던 윤휴(尹鑴)는 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족이 참최복(斬衰服, 3년)을 입는다는 『주례』규정을 들어 참최복을 주장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1660년(현종 1) 3월에 기년복의 기한이 다가오자, 남인 허목(許穆)은 ‘왕위를 계승한 아들은 장자로 간주한다’는 『의례』주소(註疏)를 근거로 자의대비의 복제 개정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등의 서인은 『의례』주소에서 대통을 계승해도 참최를 입지 못하는 네 가지 예외 규정 [사종설(四種說)] 중에서 세 번째에 있는 ‘체이부정(體而不正: 서자가 계승한 경우)’을 들어 기년복을 주장하였습니다.


    서인과 남인들의 논쟁이 격화되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태화(鄭太和)는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는 두 설을 다 버리고, 『대명률』과 『경국대전』에 ‘어머니는 장자와 중자에게 모두 기년복을 입는다’는 규정(이를 ‘국제 기년복’이라 함)을 들어 기년복의 시행을 주장하였습니다. 국왕은 몇 번의 수의(收議)를 거쳐 기년복으로 확정하였습니다.


    그러자 남인 윤선도가 상소하여 송시열의 기년설을 ‘효종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이분화[비주이종(卑主貳宗)]’한 것이라고 공격하였습니다. 이에 서인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윤선도를 탄핵하여 삼수로 유배시켰습니다. 조경(趙絅) · 권시(權諰) 등의 남인들이 윤선도를 옹호하자, 서인들은 예송에 가담한 남인들을 대거 조정에서 축출하고 정권을 독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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