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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발한메추라기알192
활발한메추라기알19223.10.10

초기 국가 시대의 고구려는 왜 약탈 경제를 할 수 밖에 없었는지요?

초기 국가 시대에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이 있었는데 그 중에 고구려는 부경이라는 창고로 약탈 경제를 하였다고 하던데 왜 약탈 경제를 할 수 밖에 없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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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론

    초기 고구려의 경제는 약탈 중심의 경제 체제였으며

    오녀산성 이라는 도읍은 농경에 불리한 지역이고 인구 또한 많이 않았습니다.


    ●본론

    곡식도 부족하고 인구도 적으니 부여나 옥저같은 강대국을 공격해서 이길 능력이 없으니 부여같은 강대한 집단의 변방으로 군소집단이 들어가서 말이나 소 같은 가축을 훔쳐서 오는 것이었다.


    ●결론

    소규모 노략질로 말이 충분해지자 대무신왕의 시기에

    기마민족형 적극적인 약탈이 시작 되었다.

    부여,낙랑,대방을 비롯한 주변의 국가 다수에게 침략과 약탈을 감행했고, 전쟁터에서 화살촉,갑옷,병장기를 회수 하는 것은 고구려 약탈경제의 기본이었습니다.

    2세기 말엽으로 접어 들면서 노략질은규모와 방식이 서서히 작아졌으며,

    그동안 행한 노략질로 성장한 고구려군은 태조왕 시절에 약탈 중심의 군대가 아닌 정복전쟁을 위한 군대로 변모했고, 주변국들을 무너뜨리고 복속시키면서 영토를 넓히고 가축과 특산품의 산지를 확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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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초기의 고구려가 했던 약탈은 쳐들어가서

    대규모로 분탕질을 하는 식이 아니라,

    부여 같은 강대한 집단의 변방으로 군소집단이 들어가서 말이나 소 같은 가축을 훔쳐서

    달아나는 좀도둑질에 가까웠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고구려에 말이 충분해지자,

    고구려는 적극적인 약탈 전쟁에 나섰고

    대무신왕의 시기에 두드러졌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흔히 생각하는 기마민족형 약탈이 시작되었다. 부여, 낙랑, 대방을

    비롯한 주변의 국가 다수에게 고구려는 침략과 약탈을 감행했고, 전쟁터에서 화살촉, 갑옷,

    병장기를 회수하는 것은 고구려 약탈경제의

    기본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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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 입니다.

    ✅️ 고구려는 오늘 날의 동북3성(중국 헤이룽장, 지린, 랴오닝) + 북한 지역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소위 '척박한 땅'이었기 때문에 정착해서 농사를 짓기 어려웠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약탈 경제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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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구려가 있던 지역은 지리상 농사를 짓기도 어렵고 가축을 키우기도 어려운 척박한 환경이었기때문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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