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의창과 상평창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고려시대 사회제도에 대해 알아보던중 궁금한게 있어서요. 고려시대 사회제도는 소극적이었지만 농민의 생활 안정을 위한 여러 제도와 시설이 마련되었다고 하는데요. 의창과 상평창에 대해 어떤 내용인지 아시는분 자세히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의창은 고려 시대의 빈민 구제 제도. 빈민이 고리(高利)로 곡식을 빌려 사용하다가 갚지 못하면 노비로 전락하였다. 농민이 노비가 되는 현상이 많아지면 국가는 재정상, 국방상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는 봄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갚게 하는 빈민 구제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고구려의 진대법, 고려의 의창, 조선 시대(15세기)의 의창, 조선 중기(16세기)의 환곡, 조선 후기(19세기)의 사창 등이 그것이다.
고려 상평창은 고려·조선시대의 물가조절기관입니다.
풍년에 곡물이 흔하면 값을 올려 사들이고, 흉년에 곡물이 귀하면 값을 내려 팔아 물가를 조절하는 기관이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위(魏)·한(漢)에서 설치, 운영되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성종 12년(993) 양경(兩京 : 開京·西京)과 12목(牧 : 楊·廣·黃·海·忠·淸·公·全·羅·昇·尙·晉의 12州)에 처음 설치되었다.
이 때 미(米) 6만 4,000석(石)을 기금으로 마련하였다. 그 중 5,000석은 개경의 경시서(京市署)에 쌓아두고, 대부시(大府寺)와 사헌대(司憲臺)가 감독하였다. 나머지 5만 9,000석은 서경과 주·군(州郡)의 창고 15곳에 분속시켰다.
그리고 서경은 분사(分司) 사헌대가, 주군은 계수관(界首官)의 관원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 후 언제부터인가는 유명무실해져 1371년(공민왕 20) 다시 설치하라는 조처가 취해졌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창 [義倉]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2001. 12. 10., 황병석), 상평창 [常平倉]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래 고려의 의창은 고구려때의 진대법에서 기원을 찾을수있으며 수나라의 의창 제도를 받아들인것으로 국초인 태조때 빈민 구휼을 위해 흑창제도를 운영한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986년 7월 성종은 태조 대의 흑창제도를 개혁하고 명칭을 의창으로 고치고 여러 주부에도 인호의 많고 적음을 고려해 이를 설치했습니다.
1과 공전에서 결당 조 3두, 2과 공전과궁원전, 사원전, 양반전에서 결당 조 2두, 3과 공전과 군인 호정 및 기인 호정에서 결당 조 1두를 거두었음으로 빈민을 구제할수있는 기본 재원을 마련이 가능해졌습니다.
의창은 무신정권기와 몽골과의 전쟁을 거치는 동안 폐지되었다가 공민왕 대에 복설이 결정되었습니다.
이 결정에 따라 1389년 양광도에 의창이 설치되었고 1391년 개경 5부에도 의창이 설치 된 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상평창은 한서 식화지에도 보이는 제도로 기원전 54년 전한의 경수창이 건의해 실시되었고 목적은 시장의 곡물 가격을 국가에서 조절하는 것으로 곡물가격이 하락할때 쌀을 사드리고, 곡물 가격이 비싸지면 사들은 곡물을 풀어 물가를 조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993년 성종은 개경 및 서경 , 양주, 광조, 충주, 청주 등 12목에 이러한 상평창을 설치하도록하고 쌀 6만 4000석을 마련했으며 이중 5000석은 경시성에서 조적하게 하고 대부시와 사헌대에서 이를 관장하게 했으며 나머지 5만 9000석은 서경, 주, 군의 창고에 두되 서경의 것은 분사 사헌대에서, 주,군 창고는 그 지역을 관할하는 계수관에서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물가 조절을 통해 빈약자들을 돕기 위해 설치한 상평창은 실제 설치 목적에 부흥하지 못하고 1371년 복설이 결정된 후에도 바로 시행되지는 못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상평창은 고려 시기에 풍년이 들면 국가에서 곡물을 사들여 곡물 가격을 올리고 흉년에는 곡물을 풀어 곡물 가격을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물가를 조절하던 기관입니다. 993년(성종 12)에 양경과 12목에 설치하였습니다. 포 32만 필로 쌀 6만 4000섬을 사들여 개경의 경시서에 5000섬을 쌓아 두고, 나머지는 서경과 주군의 창고 15개소에 나누어 보관하여 활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상평창이 물가 조절 기관이라면 의창은 빈민을 구호하는 기관으로, 엄밀히 볼 때 두 기관은 원래 기원이 되는 중국의 제도나 설치 시기가 다릅니다. 그러나 고려사에서는 이 둘을 구분 없이 서술하고 있는데, 내용상 의창에 좀 더 기울어 있습니다.
어느 시기부터인가 기관이 유명무실해지고 저축 곡식이 부족하여, 1371년(공민왕 20)에 다시 설치하라는 조처가 취해졌으나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조선 세조대 다시 설치되었다가 17세기에 진휼청과 함께 선혜청에 귀속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의창은 본시 중국 타대의 제도로 매추 민가로부터 속맥을 갹출하여 비상시에 대응하는 순전한 공제기관으로서 진대을 목적으로 하는 흑창과는 본질을 달리하는 것이라 하겠으나 세궁민의 생활을 구휼한다는 의미와 정신에 있어서는 서로 일치하는 점도 있으므로 모화주의의 성종은 마침네 의창이란 미칭으로써 흑창에 대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상평창은 물가 특히 곡가조절의 기능을 맡은 국가기관으로서, 모든 물가를 좌우하는 곡가시세가 저렴할 때에는 다소 고가로서 곡물을 매입하여 두었다가 시가가 등귀할 때는 이를 염가로 방매하는 것이니, 성종은 이 제도를 양경(개경. 서경)과 십이목 등에 설치하였다.(성종 12년).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의창(義倉)이란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시행되던 빈민 구제 제도이자 국립 구호기관으로, 가난한 백성에게 양곡을 대출하고 그것을 다시 회수하는 진휼곡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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