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건국동맹을 주도한 여운형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조선건국동맹을 주도한 여운형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도 결성하고요. 해방 직전 조선 총독부에 5개 조항도 요구하는 등 활약이 상당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여운영(呂運英)은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 들어서면서 각 지역에서 청년 단체가 설립되었다. 부산 지역[현 부산광역시 동구·중구·서구 일대] 여성들은 3·1 운동에 앞장섰던 경험이 있었고, 부산진일신여학교 출신들이거나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부산에서 태어난 여운영 또한 그런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21년 6월 부산여자청년회가 창립되었을 때 사교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3대 회장을 지냈다. 부산여자청년회의 1대 회장 양한나(梁漢拿), 2대 회장 김기숙이 모두 부산진일신여학교 출신이었으며 여운영은 부산진교회의 주일 학교 교사였다. 이 무렵까지 부산여자청년회는 계몽 운동에 주력하였다.
1924년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광범하게 확산되면서 부산 지역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1925년 9월 부산여자청년회도 6개 단체 연합으로 개최된 국제 청년일 기념식에 부산중앙여자청년회 등과 함께 참여하였고, 12월 부산청년연맹에 가입하였다. 이 같은 행로를 걷게 되면서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에 일정한 변화가 생겼지만 기독교인이었던 여운영은 민족주의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1928년 6월 16일 근우회 부산지회가 창립되었다. 근우회 부산지회는 근우회 동래지회와 달리 기존의 여성 단체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의 단체 구성원을 모아서 결성하였다. 여운영은 근우회 부산지회 설립 대회에서 임시 집행부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규약을 낭독하여 통과시키고 집행 위원을 선출하였다. 이어 근우회 부산지회 집행 위원으로 정치연구부를 담당하게 되었다. 1929년 3월 근우회 부산지회 제2회 정기 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10월 회장제를 집행 위원제로 바꾸었으며 이후 여운영의 활동은 드러나지 않는다. 근우회 부산지회의 임원이 대부분 부산청년연맹의 활동가들로 구성되어 사회주의 계열의 주도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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