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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찬하늘소177
힘찬하늘소17723.08.21

웰링턴 공작이라고도 불린 아서 웰즐리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아서 웰즐리는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상대로 승리한 것으로 유명하다는데요.


제 1대 웰링턴 공작인 아서 웰즐리의 생애는 어떠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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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796년 마이소르 전쟁에서 공을 세워 1799년 마이소르 총독이 되었고 이후 마라타 전쟁에서 계속해서 공을 세웠으며 이 시기부터 이미 보급과 대민관계에 중점을 두는 전략적 특징이 형성되었습니다.

    1804년 소 피트 내각이 성립한 후 육군상 캐슬레이 자작의 후원으로 하노버 원정대의 지휘관으로 내정되나 나폴레옹이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승하며 계획은 백지화되었고 마땅히 맡을 자리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1808년 포르투갈에서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자 비로소 원정대 지휘관으로 다시 복귀합니다.

    그 해 8월 21일 영국군 원정대는 비메이로 전투에서 프랑스 쥐노 장군의 부대를 격파, 그러나 곧이어 쥐노 부내 포로들의 송환에 합의하는 신트라 협정이 맺어짐에 따라 영국군은 더 이상 이베리아반도에서 프랑스군과 대치가 힘들어졌고 웰링턴의 부대는 본국으로 복귀합니다.

    1809년 웰링턴은 내각을 설득해 포르투갈로의 재원정을 허가 받았고 이는 나폴레옹 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 리스본에 상륙한 영국군 원정대는 포르투갈 주둔군 사령관인 술트 원수의 부대를 급습해 일거에 포르투갈을 해방시키고 에스파냐로 진격해 들어갔으며 에스타냐의 반란군과 연합한 웰링턴의 부대는 7월 27일 탈라베라 전투에서 다시 한번 프랑스군을 격파하나 마드리드를 함락시키는데는 실패, 공성을 풀고 포르투갈로 후퇴하던 웰링턴은 부사코 전투에서 이를 추격해오던 마세나 원수의 부대를 무찔렀습니다.

    리스본에서 농성하면서 토레스베드라스 요새선을 구축한 웰링턴의 부대에 대해 프랑스군은 손을 쓸수 없어 결국 마세나는 1811년 봄 포르투갈을 포기하고 철수합니다.

    1812년 병력을 보충하여 반격에 나선 웰링턴은 그 해 7월 22일 살라망카 전투에서 4만명에 이르는 프랑스군을 40분만에 격멸하는 대승리를 거두고 8월 12일 마드리드에 입성, 1813년 6월 21일 비토리아 전투로 이베이라반도의 프랑스군은 완전히 궤멸되었고 살아남은 프랑스군은 모두 피레네 산맥을 넘어 도망칩니다.

    프랑스의 배후였던 이베리아반도를 장악함으로 캐슬레이는 다시 대프랑스 동맹의 형성을 주도할수 있었고 이 동맹은 나폴레옹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게 되며 웰링턴은 공로를 인정받아 공작으로 승작, 50만 파운드의 포상금을 받았습니다.

    캐슬레이와 함께 영국 사절단을 대표해 빈 회의에 참가한 웰링턴은 회의 도중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여 프랑스로 복귀하자 군을 지휘하기 위해 빈을 떠났고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인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은 프로이센의 블뤼허 원수와 협력해 영국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 공로로 웰링턴은 로버트 필과 함께 토리당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고 1828년 지휘관을 사임하고 영국의 총리가 됩니다.

    재임 기간 동안 가장 큰 일은 가톨릭교도 해방령 논의로 대니얼 오코넬이 국회의원으로 선출은 되었으나 가톨릭 차별법으로 의회에 들어갈수 없게 된 것이 계기로 논쟁이 번졌던 일이며 웰링턴은 보수주의 토리당 소속이었음에도 가톨릭 해방령을 옹호해 당내의 반대를 샀고 도리어 휘그당의 지지로 가톨릭 해방령을 통과시킵니다. 조지 4세가 이를 거부하려 하자 총리직을 사임하겠다며 위협, 그러나 이로 인해 국내 곳곳에서 반발이 터져 다시 토리당의 보수 정책을 고집하다 1830년 휘그당의 그레이 백작에게 총리직을 넘기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796년 마이소르 전쟁에서 공을 세워 1799년 마이소르 총독이 되었고, 이후 마라타 전쟁에서 계속해서 공을 세웠다. 이 시기부터 이미 보급과 대민관계에 중점을 두는 전략적 특징이 형성되었다.

    1804년 소 피트 내각이 성립한 후, 육군상 캐슬레이 자작의 후원으로 하노버 원정대의 지휘관으로 내정되었으나, 나폴레옹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승하면서 계획은 백지화되었고, 마땅히 맡을 자리가 없어져 버렸다. 1808년 포르투갈에서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자 비로소 원정대 지휘관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그 해 8월 21일 영국군 원정대는 비메이로 전투에서 프랑스 쥐노 장군의 부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곧이어 쥐노 부대 포로들의 송환에 합의하는 신트라 협정이 맺어짐에 따라 영국군은 더 이상 이베리아반도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하기 힘들어졌고, 웰링턴의 부대는 본국으로 복귀했다.

    1809년, 웰링턴은 내각을 설득하여 포르투갈로의 재원정을 허가받았다. 이것은 나폴레옹 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리스본에 상륙한 영국군 원정대는 포르투갈 주둔군 사령관인 술트 원수의 부대를 급습하여 일거에 포르투갈을 해방시키고 에스파냐로 진격해 들어갔다. 에스파냐의 반란군과 연합한 웰링턴의 부대는 7월 27일, 탈라베라 전투에서 다시 한번 프랑스군을 격파했으나, 마드리드를 함락시키는데는 실패했다. 공성을 풀고 포르투갈로 후퇴하던 웰링턴은 부사코 전투에서 이를 추격해 오던 마세나 원수의 부대를 무찔렀다.

    리스본에서 농성하면서 토레스베드라스 요새선을 구축한 웰링턴의 부대에 대해 프랑스군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결국 마세나는 1811년 봄, 포르투갈을 포기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812년 병력을 보충하여 반격에 나선 웰링턴은 그 해 7월 22일 살라망카 전투에서 4만명에 이르는 프랑스군을 40분만에 격멸하는 대승리를 거두고, 8월 12일 마침내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1813년 6월 21일비토리아 전투로 이베리아반도의 프랑스군은 완전히 궤멸되었고, 살아남은 프랑스군은 모두 피레네 산맥을 넘어 도망쳤다.

    프랑스의 배후였던 이베리아반도를 장악함으로써 캐슬레이는 다시 대프랑스 동맹의 형성을 주도할 수 있었으며, 이 동맹은 나폴레옹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었다. 웰링턴은 공로를 인정받아 공작으로 승작되었고, 50만 파운드의 포상금도 받았다.

    캐슬레이와 함께 영국 사절단을 대표하여 빈 회의에 참가한 웰링턴은 회의 도중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여 프랑스로 복귀하자, 군을 지휘하기 위하여 을 떠났다.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가 된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은 프로이센블뤼허 원수와 협력하여 영국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공로로 웰링턴은 로버트 필과 함께 토리당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고, 1828년 지휘관을 사임하고 영국의 총리가 되었다.

    총리 재임 동안 있었던 가장 큰 일은 가톨릭교도 해방령 논의로, 대니얼 오코넬이 국회의원으로 선출은 되었으나 가톨릭 차별법으로 의회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이 계기로 논쟁이 번졌던 일이다. 웰링턴은 보수주의 토리당 소속이었음에도 가톨릭 해방령을 옹호하여 당내의 반대를 샀고 도리어 휘그당의 지지로 가톨릭 해방령을 통과시킨다. 조지 4세가 이를 거부하려고 하자 총리직을 사임하겠다며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국내 곳곳에서 반발이 터져나와 다시 토리당의 보수 정책을 고집하다가 결국 1830년 휘그당의 그레이 백작에게 총리직을 넘기게 된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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