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화진전투가 7일동안 버틸수 있던 원동력은?
안녕하세요 고려거란전쟁의 흥화진전투가 40만의 거란대군을 맞아서 7일동안 버터내는데 성공했다는데 그럴수있었던 원동력은 어떻게 되는지요?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는 북쪽 변방에 위치해 있어 거란과의 전쟁에 대비할 시간이 충분했습니다. 특히 흥화진은 소가죽으로 만든 방어물인 소가죽 갑옷을 설치하고, 인근 산성에 군사들을 매복시키는 등 지형과 기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흥화진은 강동 6주 중에서도 가장 위쪽에 위치해 거란과의 전투가 수시로 치뤄졌지만, 성 자체를 공격과 방어에 잘 맞춰 만들어 승리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화진 성은 현재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면 에 위치한 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 주변의 지리적인 위치로 성을 지키면서 거란군을 물리 칠수 있었던 것 입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거란이 1차 침입 때 강동 6주를 넘겨준 것을 후회하고 그 중요성을 알게 되었는데 때마침 고려에서 강조정변이 일어나자 요의 성종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2차 침입을 했습니다. 그러나 강동 6주 중 하나인 홍화진에서 거란의 40만 대군의 공격을 악전고투로 막아낸 이가 양규장군이었습니다. 이에 거란은 20만은 남겨두고 20만으로 개경으로 진군하여 파죽지세로 공격해왔습니다. 이에 강감찬은 현종에게 작전상 후퇴를 건의하였고 현종은 이를 받아들여 항복하지 않고 나주까지 피신하게 됩니다. 현종의 친조를 약속받은 거란은 서경 통주를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한반도 깊숙히 들어온 까닭에 서둘러 후퇴를 합니다. 이때 거란의 후방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거란 주력군은 식량과 무기의 공급이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양규장군은 거란이 홍화진을 포기하고 개경으로 향하자 이웃성들의 남은 병사와 협력하여 거란군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고려군의 타격목포는 바로 거란 황제가 빼앗은 물건들과 고려 포로를 지키기 위해 남아 있던 거란군이었습니다. 양규장군은 고려 포로 1만여명을 구해내고 7000여명의 거란군의 수급을 베었으나 거란 대군의 포위에 결국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규 장군 등의 결사항전 등으로 인하여
가능하였고 흥화진 성이 삼수채가 휘감고 있어
규모는 작으나 막강한 방어력을 자랑하였기에 가능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