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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5.06

철종임금은 왜 후사없이 요절하였나요?

조선후기 철종임금은 세도정치 시기에 힘들게 보위를 유지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철종의 아들이 아닌 고종이 다음왕으로 등극하였는데요.

후손이 없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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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06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왕조 제 25대 왕(재위 1849~1863). 1844년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 궁중에 들어와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나 정치에 어둡고 외척인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했다.

    휘(諱) 변(昪). 초명 원범(元範). 자 도승(道升). 호 대용재(大勇齋).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광()의 셋째 아들로, 조부는 장조(장헌세자)의 아들인 은언군이다. 비(妃)는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金氏)이다.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懷平君) 명(明)의 옥사(獄事)로 가족과 함께 강화(江華)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純祖妃)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와 덕완군(德完君)에 책봉되었으며, 1849년 19세로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 후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으며, 1851년 대왕대비의 근친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를 삼았다. 문근은 국구(國舅)로서 정권을 장악,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하였다. 1852년부터 왕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나 정치에 어둡고, 김씨 일파의 전횡(專橫)으로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극심한 민생고를 유발, 경상도 진주(晉州), 함경도 함흥(咸興), 전라도 전주(全州) 등지에서 대규모의 민란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속출하는 민란을 근본적으로 수습하려는 의욕조차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회정세에서 최제우(崔濟愚)가 주창한 동학사상은 학정에 허덕이는 민중 속으로 놀라운 속도로 파급,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었으며, 만민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의 사상도 일반 민중은 물론 실세(失勢)한 양반층에까지 침투되어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철종은 결국 재위 14년간 세도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색에 빠져 정치를 바로잡지 못한 채 병사하였다. 능(陵)은 예릉(睿陵:高陽)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철종 [哲宗]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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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철종은 철인왕후로부터 1858년 원자 이융준을 낳으나 6개월만에 죽고 후궁들에게서 얻은 아들 또한 영아기에 사망, 자녀 중 유일하게 혼례를 치른 영혜 옹주 또한 14세에 사망해 그의 후손은 단절되어 후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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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58년 그에게는 유일한 적장자 이융준이 태어났지만 6개월만에 사망하였고 후궁들에게서 얻은 아들들 또한 영아기에 사망하였다. 자녀 중 유일하게 혼례를 치른 영혜옹주 또한 14세에 사망하여 그의 후손은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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