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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스컹크183
우람한스컹크18323.08.11

효종의 직계인 철종 이후 고종이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효종의 직계는 철종에서 끝기고 철종과는 거의 남이나 다를바없는 수준의 친척인 17촌의 고종이 조선의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 정도로 조선에 왕위계승가능자의 씨가말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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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1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아버지 흥선군이었습니다. 조선 역사상 왕이 아니면서 이처럼 적극적으로 아들의 왕위 계승을 주도한 인물은 없었습니다. 흥선군은 철종에게 후사가 없는 상황을 주목했고 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 후대 왕 결정의 책임은 대왕대비에게 있었습니다. 병세가 악화되어 위중했던 철종이 승하하고 나면 왕위후계자를 결정할 권한은 신정왕후에게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안동김씨 세도 정치기로 말을 안들으면 안동김씨 세력이 역모의 누명을 씌워 처형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원군은 신정왕후에게 접근하여 안동 김씨를 몰아내자는 뜻을 같이하였고, 정조의 조카손자로 후계자 조건을 만족했기 때문에 철종이 돌아가시고 나면 자기 아들을 왕으로 해달라고 청탁하게 됩니다. 당시 흥선군에게는 첫째 아들이 있었습니다. 19살이었던 첫째 아들이 왕위에 즉위하면 성인이기 때문에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이 불가했습니다. 이 때문에 둘째 고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여 수렴청정이 가능하도록 합니다. 결국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명복(고종)이 조선의 제26대 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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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종이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의 뒤를 이어 1863년 즉위하게 된 것은 아버지 흥선군과 익종비 조대비와의 묵계에 의해서입니다.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세도정치를 한 안동김씨는 철종의 후사가 없자 뒤를 이를 국왕 후보를 두고 왕손들을 경계, 이때 안동김씨 세도의 화를 피해 시정 무뢰한과 어울리고 방탕한 생활을 자행하며 위험을 피한 이하응은 조성하를 통해 궁중 최고의 어른인 조대비와 긴밀한 연락을 취했고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재빨리 흥선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으로 하여금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 그를 익성군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해 국왕에 즉위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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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사실상 철종이 후사가 없었고(조선 후기 왕실의 씨가 번성하지 못함.), 그 외에 왕위를 이을만한 적장자 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노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조대비와 결탁하여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명복을 즉위시키는데 성공하였는데 이게 바로 고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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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철종은 아들이 없었습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아버지 흥선군이었는데 조선 역사상 왕이 아니면서 이처럼 적극적으로 아들의 왕위 계승을 주도한 인물은 없었습니다. 흥선군은 철종에게 후사가 없는 상황을 주목하고 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 후대 왕 결정의 책임은 대왕대비에게 있었던 것을 누구 보다더 잘 아는 지라 흥선군은 왕위 계승 지명권을 가진 신정왕후(조대비)에 대한 신임이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길임을 진작부터 직감했고 신정왕후가 무엇보다 60년간 세도정치의 중심이 된 안동 김씨 세력 약화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도 흥선군에게는 힘이 됐기에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던 흥선군은 신정왕후와 잦은 접촉을 가지면서 안동 김씨 세력과 경쟁 구도를 가질수 있는 자신을 아들을 왕위에 올린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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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63년 12월 철종이 재위 14년 만에 33세의 나이로 창덕궁에서 후사 없이 죽자, 대왕대비 조씨는 흥선군 이하응(李昰應)과 여흥부대부인의 둘째 아들인 명복(命福)을 다음 왕으로 결정했다. 이에 철종이 승하한 지 5일만에 명복, 즉 고종이 창덕궁 인정전에서 조선 제26대 왕으로 등극했다.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혈통으로만 따지면 고종은 왕위에 오르기 힘든 위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복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외척인 안동김씨를 숙청하려는 대왕대비 조씨와 부랑배 노릇까지하며 기회를 엿보던 흥선군의 정치적 입장이 맞았기 때문이다.


    명복은 익종(翼宗, 효명세자)의 후계이자 대왕대비 조씨(이하 조대비)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고종의 어린 시절 이름은 개똥이었다.


    소년기에 명복으로 개명했고 왕이 된 뒤에는 이름을 다시 재황(載晃)으로 바꾸었다. 형인 이재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조대비의 수렴청정이 손쉽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12살의 고종이 정치를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대비의 수렴청정은 고종 즉위 후 10년간 이어졌다. 그러나 사실상의 실권은 부친인 흥선 대원군(이하 대원군)이 장악하였다. 대원군의 집권 시기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발발하는 등 서구 열강의 침입이 노골화되어 가던 시기였다.


    대원군은 외교상 통상수교거부정책(쇄국정책)을 쓰며 통상압력을 물리쳤고 이와 아울러 서원을 대대적으로 없애 외척을 비롯한 양반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아울러 1866년에는 여흥 민씨 집안의 딸(훗날의 명성황후)을 자신의 며느리이자 고종의 배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며느리가 그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맞수가 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출처 : 인물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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