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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내일도모레도
오늘도내일도모레도23.08.31

마을 입구에 장승을 세워둔 이유가 무엇인가요?

시골에가면 마을 입구에 장승을 세워두기도하는데 마을 입구에 장승을 세워두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장승을 세우는것은 언제부터 있던 문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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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3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이나,병등을 막아달라는 기원의 표현이며 마을의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합니다. 한마디로 수호신 역할입니다.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마을 입구에 정승을 세워두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정승은 조선시대의 최고 관직으로, 부와 권위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마을 입구에 정승을 세워두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할 수 있습니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정승은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마을 입구에 정승을 세워두면 마을을 지키고 외부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마을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정승은 조선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입니다. 따라서 마을 입구에 정승을 세워두면 마을의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정승은 보통 나무로 만들어지며, 의관을 갖추고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정승의 얼굴은 마을의 수호신이자 신령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의인화되어 있습니다. 정승의 입에는 종종 "풍년만세"라는 말이 새겨져 있어, 마을의 풍요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승은 단순한 경계표나 이정표의 역할과 함께 잡귀와 질병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수호신이며, 때로는 개인의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대상으로서의 신앙적인 성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함부로 건드리거나 손대지 않고 신성됩니다. 장승에게 지내는 동제(洞祭)의 하나로 장승제가 있는데 이는 역질을 막고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행해지는 것으로, 주민들이 힘을 모아 마을의 액을 밖으로 내몰고 마을을 정화시키는 데 목적을 둡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승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대의 성기숭배에서 나온 것, 장생고에 속하는 사전의 표지에서 나온것, 목장승은 솟대에서, 석장승은 선돌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등의 여러 설이 있으나 정확히 알수 없습니다.

    장승의 기능은 지역간의 경계표 구실, 이정표 구실,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승의 어원은 1527년 최세진이 『훈몽자회(訓蒙字會)』(중권 제9장)에서후(堠)를 설명하면서 ‘댱승 후’라 기록하였으며, 이 ‘댱승’이 ‘쟝승→장승’으로 변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장승의 한자어 표기는 장생(長生, 長栍)으로 나타나며 조선시대에는 ‘댱생’이라 발음했지만 이도 ‘댱승→쟝승→장승’으로 변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장승을 부르는 명칭에는 장생, 장성, 장싱, 장신, 벅수, 벅슈, 벅시, 후, 수살, 수살막이, 수살목 등이 있다. 명칭으로 보아 장승이 일반적인 용어이며, 한자어로는 장생(長生, 長栍)·장성(長性)·장신(長神)·장승(張丞) 등으로도 쓰고, 사투리로 장싱이라 부르는 곳도 있다.


    벅수라는 말은 경상도 해안 지역과 전라도에서는 장승을 벅수, 벅슈, 벅시 등으로 부른다. 이는 법수(法首) 또는 법슈에서 온 것이 아닌가 추측되지만 확실치 않다. ‘법수’의 의미를 ‘신선’ 또는 ‘선인’으로 보는 이도 있다. 후(堠)는 옛 문헌에 장승을 표현한 글자이고, 수살·수살막이·수살목 등으로 표현한 것은 장승을 세워서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살(煞)인 나쁜 재액을 막아 준다고 여기고 붙인 말이다.

    일찍이 손진태는 우리나라 장승의 기원을 부족국가시대의 소도, 입석, 누석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63항)에 전남 장흥군의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보조국사 영탑비명에 ‘장생표주(長栍標柱)’라는 명문이 있음을 보아 당시에도 장생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같은 책(291항)에 양산 통도사 국장생 석표의 기록에는 손내천(孫仍川, 또는 손잉천)에 국장생(國長栍)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 울주의 상천리에도 고려시대에 세웠다는 국장생이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영암군 불우조)에도 국장생의 기록이 있다. 이들은 모두 조선시대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4, 보양리목조)에 청도 운문산선원에 장생이 있었다(943)는 기록과 운문산선원에 장생표탑(長生標塔)이 있었다(946)는 기록도 보인다.


    조선 전기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권5)에 ‘김해에서 밀양으로 가는 길가에 장생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권24, 여지고 도리조)에 ‘석장생(石長栍)’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이상의 역사적인 여러 기록을 보아 신라·고려·조선시대를 막론하고 장생, 장생표주, 장생표탑, 국장생, 황장생 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각기 기능은 달랐겠지만 모두 장승이었음은 물론이다. 우리나라 여러 곳에 예부터 장승을 깎아 세우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면서 장승제를 지내고 있는 마을이 많다. 충남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의 장승제는 은산별신제와 같이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충남 공주시 탄천면 송학리 소라실, 청양군 대치면 대치리 한티, 이화리 새점, 정산면 용두리, 천장리, 송학리 상송, 아산시 송악면 종곡리의 장승제도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몇 백 년이 되었다 전한다.


    또 오래전부터 장승제를 지내오고 있기는 하지만 오래되어 역사를 잘 모르는 곳으로는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 충북 옥천군 군서면 사정리 사기점과 동이면 청마리 마티, 충남 연기군 소정면 대곡리 한적골 등이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판소리 사설 「가루지기타령」에 나오는 전북 함양군의 장승도 오래되었다. 함양 마천면 추성리의 벽송사에는 약 100년 된 것으로 보이는 유명한 목장승이 장승각에 보관되어 있다. 돌장승으로는 세운 연대를 알 수 없는 영암 쌍계사지 돌장승, 18세기 중엽에 세웠을 것으로 보는 나주 불회사의 돌장승과 운흥사의 돌장승도 유명하다. 1906년에 세웠다는 명문이 있는 통영의 돌벅수도 특색 있는 장승이다.

    출처 : 한국민속신앙사전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승의 기능은 첫째 지역간의 경계표 구실, 둘째 이정표 구실, 셋째 마을의 수호신 역할입니다. 길가나 마을 경계에 있는 장승에는 그것을 기점으로 한 사방의 주요 고을 및 거리를 표시하였습시다.


    수호신으로 세운 장승에는 이정표시도 없으며, '천하대장군'류의 표시도 없고 마을의 신앙 대상으로서 주로 액병(厄病)을 빌었습니다.


    장승의 기원은 솟대, 선돌, 신목, 등과 함께 신석기, 청동기 시대의 원시 신앙 물로서 유목, 농경, 문화의 소산으로 파악됩니다. 일종의 수호신앙으로서 씨족, 부족민의 공통적 염원을 담은 제정일치 시기 지배이념의 표상으로서 기능 하다가 삼국 시대 들어 중앙 집권적 국가 기틀이 마련되고 불교, 도교, 유교, 등의 통치 이대올로기가 체계화됨에 따라 불교의 습합되어 전승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