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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찬밀잠자리170
대찬밀잠자리17023.06.29

조선시대 박지원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조선시대에 박지원이라고 한글로 소설도 쓰고 열하일기도 쓰고 여러가지 문학작품에 많이 나오던데 어떤 벼슬을 했고 어느지위까지 올라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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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9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박지원(1737년 ~ 1805년)의

    본관은 반남, 자는 중미, 호는 연암입니다.

    1737년(영조 13) 한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입니다.

    배청의식이 강하게 작용하던 시기에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북학론을 전개하였으며, 중상주의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서는 <열하일기>, <허생전>, <연암집>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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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관 반남, 자 중미, 호 연암으로 돈령부지사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라다 16세에 조부가 죽자 결혼, 처숙 이군문에게 수학,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했습닏.

    1777년 권신 홍국영에 의해 벽파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다 1780년 친족형 박명원이 진하사 겸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했고 랴오둥, 러허, 베이징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 보고 기행문 열하일기를 통해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의했습니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이 되고 1789년 사복시주부, 이듬해 의금부도사, 제릉령, 1791년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을 역임한 뒤 사퇴했다가 1797년 면천군수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 2권을 찬진하고 1800년 양양부사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습니다.

    당시 홍대용, 박제가 등과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해 여러 편의 한문소설을 발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이 그의 제자들이며 정경대부가 추증되었습니다.

    저서에는 연암입, 과농소초, 한민명전의 등이 있고 작품으로는 허생전, 호질, 마장전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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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에 태어나 1805년(순조 5)에 사망했습니다. 과거에 실패한 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저술에 전념했고 청 사절단을 수행, 북경·열하를 여행한 뒤 『열하일기』를 지었습니다. 이 책에는 청의 발전한 문물을 수용해 나라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북학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뒤늦게 지방관으로 재직하며 그러한 사상을 직접 실천하기도 하고 서학에도 관심이 많았고, <허생전> 등 문학 작품도 남겼는데 모두가 북학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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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 박지원은 실학과 서학을 공부하고 개혁을 주장한 근대 사상가이자 문인이었습니다. 여러 대신들과 교류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열하일기』, 『영모전』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박지원은 조선의 사회와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온 인물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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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박지원은 조선후기 한성부판관,

    면천군수, 양양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입니다

    1737년(영조 13)에 태어나 1805년(순조 5)에 사망했으며, 과거에 실패한 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저술에

    전념했습니다. 청 사절단을 수행, 북경·열하를 여행한 뒤 『열하일기』를

    남겼습니다.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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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암 박지원은 1786년 정조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었고 이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ㆍ제릉령(齊陵令),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에 사퇴했다가 1797년 다시 면천 군수(沔川 郡守)가 되었다. 1800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하였으나 다음 해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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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盤松坊)야동(冶洞)에서 출생하였다.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강하고 매우 영민해 옛사람의 선침(扇枕)과 온피(溫被) 같은 일을 흉내내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벼슬 없는 선비로 지냈기 때문에 할아버지 박필균이 양육하였다. 1752년(영조 28) 전주이씨(全州李氏)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혼인하면서 『맹자(孟子)』를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특히 이보천의 아우 이양천(李亮天)에게서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비롯해 주로 역사 서적을 교훈받아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고 많은 논설을 습작하였다. 수년간의 학업에서 문장에 대한 이치를 터득했으며, 처남 이재성(李在誠)과 평생 문우로 지내면서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다.


    1760년 할아버지가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하였다. 학문이 뛰어났으나 1765년 처음 과거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후로 과거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박제가(朴齊家)·이서구(李書九)·서상수(徐常修)·유득공(柳得恭)·유금(柳琴)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가졌다.

    이 때를 전후해 홍대용(洪大容)·이덕무(李德懋)·정철조(鄭喆祚) 등과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대해 자주 토론했으며, 이 무렵 유득공·이덕무 등과 서부 지방을 여행하였다. 당시 국내 정세는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잡아 벽파(僻派)였던 박지원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결국 황해도 금천(金川)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했는데 박지원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려진 것도 이에 연유한다.


    이곳에 있는 동안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였다. 1780년(정조 4)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다가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청의 고종 70세 진하사절 정사로 북경으로 가자, 수행(1780년 6월 25일 출발, 10월 27일 귀국)해 압록강을 거쳐 북경·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 때의 견문을 정리해 쓴 책이 『열하일기(熱河日記)』이며, 이 속에서 평소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저술로 인해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했으나 문원(文垣)에서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1786년에 뒤늦게 음사(蔭仕)로 선공감감역에 제수된 것을 필두로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1791년 한성부판관, 1792년 안의현감(安義縣監),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 1800년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안의현감 시절에는 북경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으며, 면천군수 시절의 경험은 『과농소초(課農小抄)』·『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안설(按說)』 등을 남기게 되었다. 박지원이 남긴 저술 중에서 특히 『열하일기(熱河日記)』와 위의 책들은 박지원이 추구하던 현실 개혁의 포부를 이론적으로 펼쳐보인 작업의 하나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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