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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양241
빼어난양24123.10.21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당시 금서인 이유가 무엇인가요?

박지원이 청나라를 갖다오고 열하일기를 집필하는데요 그런데 당시 조선에서는 이 열하일기를 금서목록으로 정하는데 그 배경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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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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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 작품은 당시 유행하던 문체와는 달리 자유로운 서술 방식을 사용하였으며, 이로 인해 정조로부터 문체반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문체반정은 보수적인 문체를 장려하고 자유로운 문체를 금지하는 정책으로, <열하일기>는 이 정책의 일환으로 약 1세기 동안 금서 목록에 올랐습니다. 따라서, <열하일기>는 박지원의 사후 200년이 넘도록 출판되지 못하고 손으로 글을 베낀 필사본의 형태로 유통되었습니다. 그러나, 선비들 사이에서는 출간 전부터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다양한 필사본이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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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0.21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조의 문체반정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문체반정이란 한문의 문장체제를 순정고문으로 회복하자는 정책을 말합니다.

    조선 정조는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보는 바와 같은 참신한 문장에 대하여 그것이 소품 소설이나 의고문체에서 나온 잡문체라 규정하여 정통적 고문인 황경원 ·이복원 등의 문장을 모범으로 삼게 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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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열하일기에서 보여준 박지원의 독특한 이야기식 글쓰기는 '연암체'라는 참신한 문체를 창조해냈지만 정조를 비롯한 정통 고문(古文)을 수호하는 기득권층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열하일기'는 금서로 지정되어 정식으로 출판될 수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연암체의 특징은 소설식 문체와 해학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통 고문에 구애되지 않고, 소위 패사소품체라고 불리던 소설식의 표현방법을 과감히 도입해 쓰고 현실의 생동하는 모습을 묘사 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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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792년 10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금서로 지목되는데 이는 문체반정으로 문장이 잡스럽다는게 표면적인 이유였고, 정조가 백탑파로부터 등을 돌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 이덕무, 유득공, 백동수 등 젊은 실학자로 구성된 백탑파는 정조와 뜻을 함께하며 국가의 혁신을 꿈꾸나 정조가 백탑파의 문체가 단정하지 못하다며 탄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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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조 재위 당시 박지원은 청의 발달한 문물을 수용하자고 주장한 북학 사상가입니다. 그는 문장도 고전문을 배격하고 비속어, 해학, 풍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연암체라고 하고 <열하일기>, <양반전>,<허생전>등에 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집권 붕당인 노론 벽파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던 정조의 입장에서는 박지원이 노론 벽파 계열이고, <열하일기>에 사용된 문체가 타락하고 순수하지 못하다고 지적하며 금서로 지정하는 '문체반정'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박지원은 문체반정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문체반정은 정조의 왕권 강화를 위한 노론 벽파와 대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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