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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6

백두산 정계비의 설치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백두산 정계비의 설치과정에 대한것인데요.

백두산 정계비는 언제 어느시대에 누가 설치했었나요?

그리고 설치 목적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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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712년(숙종 38년) 백두산에 세운 비석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선을 표시한 경계비이다. 정상이 아닌 해발 2,2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의 압록과 동쪽의 토문을 분수령으로 삼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비석은 인적이 드문 곳에 설치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잊혔다. 그 후에 러시아와 일본 등이 이 일대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청나라와 조선도 비석의 내용을 다시 관찰하게 되었다. 양측은 1883년 비석을 다시 조사했는데, 비석 내용의 ‘토문’이라는 말을 놓고 조선과 청나라는 의견이 엇갈렸다.

    우리는 만주 쑹화 강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했고, 청나라는 두만강이라고 주장해 합의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백두산 북쪽 지역에 우리 민족이 많이 이주해 있어 현실적으로는 조선 영토로 인정이 되었다. 1909년 일제는 청나라와 간도 협약을 맺어 남만주의 안동-봉천 간 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버렸다. 비석도 1931년 만주 사변 당시 일제가 철거해 버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두산정계비 [白頭山定界碑] (Basic 중학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2006. 11. 15., 이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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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든든한소쩍새224
    든든한소쩍새22423.05.16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희제는 전국적인 지리지 편찬 사업을 추진하면서 백두산 일대에 대한 자체적인 지리 조사와 더불어 조선에 대해 사계(査界)를 비공식적으로 계속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은 영고탑 회귀설 등 대청(對淸) 위기의식의 불안감으로 이를 거부하다가 1712년에 강희제가 황명으로 공식적으로 요청하자 받아들이게 된다.


    1712년(숙종 38년)에 청나라는 목극등을 사신으로 파견하고, 조선 측에서는 함경부사 이선부와 참판 박권이 접반사로 혜산진에서 맞이하였으며, 목극등은 이의복·조태상 등과 함께 음력 5월 15일 백두산에 올랐다가 천지(天池)에서 내려와 수원(水源)을 찾아내고, 산정(山頂)의 남동쪽으로 4km 지점인 해발 2,150m 지점의 분수령에 비를 세웠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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