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 평안도는 중국과 접경한 곳으로 명, 청과의 교역이 이루어졌고 정기적으로 운영되는 무역뿐 아니라 잠상에 의한 밀무역도 성행했는데 이는 산간지대가 많고 평야가 적어 농업에 불리한 평안도에 상공업이 발전하는 계기 중 하나로 작용했으며 평안도 각지에서 은광과 금광이 발견되고 교역에 필요한 은과 금이 채굴되면서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곳에 새로운 사회층이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중국과의 교역, 광산의 채굴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부민은 신향을 구성하여 지역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으나 기존에 지역 사회를 장악하던 원향과 대립하여 의도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막대한 재산을 보유한 신량은 도리어 지방관의 수탈 대상이 되었습니다.
평안도는 조선 전기에 비로소 개척되었고 이주를 통한 인구의 충원으로 유력한 가문이 적었고 죄를 지은 자의 집안을 평안도에 유배하면서 이들이 가문을 형성한 사례가 많았는데 이러한 상황은 평안도에 대한 정치적 차별로 발전합니다. 이에 평안도 출신 응시자의 과거 합격률이 적지 않음에도 평안도인은 요직에 오르지 못하고 한직을 전전하게 됩니다.
경제력을 배경으로 하는 평안도 신향에 대한 억압과 평안도에 대한 정치적 차별은 지역 사회의 불만을 야기했고, 홍경래의 난이 발생하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로 작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