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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비둘기23.07.16

척준경이라는 인물이 그강함에 비해서 역사적으로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한이유는?

흔히 한국의 역사상 가장 강했던 무장 순위를 꼽을때 1순위로 등장하는 사람이 척준경일것입니다.

그 강함이 글로는 표현이 되지못할수준이라는 극찬을 받는경우가 대부분인데요

신기한것이 그의 강함은 널리알려져있는데 그의 업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척준경 장군이 강함에 비하여 역사적인 업적이 없는 이유는 무엇때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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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척준경은 조선의 장군이었으나, 그의 역사적인 업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는 그가 활동 했던 시기가 조선 후기의 혼란한 시기이므로 그의 행적이 정확하게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외적과의 전쟁보다는 내적과의 분쟁에 더 많이 참여했으므로 그의 업적이 인정 받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제 답변이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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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부적인 부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으로 기록상에 등장하는 그의 행적은 대다수 여진족 몇명을 베었다, 이자겸과 붙어먹었다 등의 거시적인 행적뿐이고 상세한 과정이나 그 속에서 사람들과 어떠한 대화를 나누었는지 등의 기록이 거의 없기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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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척준경의 맹장임에는 틀림없으나 그에 비해 박한 평가를 받는 이유는 결국 그는 권력을 다룰 줄 몰라 본인을 올바른 방향으로 써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여진과의 전쟁 때는 고려의 명장이자 존경받는 문관이기도 한 윤관의 밑에서 눈부신 전공을 쌓고 구국의 맹장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이후 그를 써준 사람이 하필이면 권신 이자겸이라 간신을 지키는 맹견으로 전락하여 전횡에 일조하다 뒤늦게나마 임금의 편으로 돌아섰음에도 결국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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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를 넘어 한국사 전체에서도 손에 꼽히는 맹장. 하급 남반 관리 출신으로 숙종 명효왕 대에 무관이 됐고 예종 시기 여진정벌에 참여해 큰 공을 세웠다. 고려 초기의 유금필과 양규, 그리고 후기의 최영, 이성계와 함께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무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여진 정벌기 내내 독보적인 전공을 쌓았다.


    군대를 통솔할 때도 혁혁한 성과를 보여줬는데, 단신으로 보여준 퍼포먼스는 말이 안 되는 수준. 혼자서 공성전의 판세를 뒤엎고, 전멸 직전의 상황에서 10명 남짓한 결사대로 지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었으며, 성이 포위당한 상황에서 결사대와 함께 무장한 병사 십여 명을 거뜬히 베어넘겨 포위진을 와해시키질 않나, 밤을 틈타 포위를 뚫고 국경까지 내달려 구원군을 편성해 왔다는 믿기 힘든 공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건 동네 주먹싸움과는 차원이 다른 오롯이 전쟁에서 세운 공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얼마나 죽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영향을 끼쳤느냐이며 군사들의 사기는 말할 것도 없다.


    윤관 휘하로 들어가기 전부터 뛰어난 맹장으로서의 편린을 보였고 윤관 휘하로 들어가서는 윤관의 기록 대부분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엄청난 전공을 세운 그는 1, 2차 정벌 동안 재상인 윤관과 친해졌으며 전쟁 종결 후 문관직에 올라 점차 강한 권력을 쥐게 된다. 동북9성을 세울 곳의 지형조차 제대로 다 파악하지 못한 채 벌어졌던 9성 정벌은 그가 없었다면 윤관이 전사하는 비극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인종 대에는 외척 이자겸에게 포섭되어 정권을 주도했지만 결국 인종에 의해 제거된다. 척준경은 전쟁에서의 공은 걸출했으나 정쟁에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고 이는 결국 초라한 결말로 이어져 후대의 평가도 갈리게 되었다. 다만 무예만 놓고 보면 척준경은 따라올 수 없는 전공을 세운 무사였다. 한국사에 등장한 무장 중 전술 전략의 구상 및 지휘의 형태가 아닌 개인의 무력만으로 척준경보다 더 큰 전공을 세운 무장은 없다.


    그러나 척준경 본인은 단순히 순수한 무인이었을 뿐 나름의 정치적 식견은 결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성품이 고결하지 않았지만 표리부동하지도 않았고 전장에서는 일당백이었으나 배움이 짧고 인간됨이 맞지 않아 큰 그림을 그리거나 정국을 주도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척준경에 비교되는 무인들을 봐도 유금필, 최영, 이성계는 장군으로서 백전불패에 가까운 명장들이었으며 정치적으로도 최소한 큰 누가 될 만한 행동은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척준경에겐 그러한 감각조차 없었다.


    결국 그는 권력을 다룰 줄 몰라 본인을 올바른 방향으로 써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여진과의 전쟁 때는 고려의 명장이자 존경받는 문관이기도 한 윤관의 밑에서 눈부신 전공을 쌓고 구국의 맹장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이후 그를 써준 사람이 하필이면 권신 이자겸이라 간신을 지키는 맹견으로 전락하여 전횡에 일조하다 뒤늦게나마 임금의 편으로 돌아섰음에도 결국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칼로 흥하고 칼로 망한 자의 표본.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맹활약하고, 이후엔 권세를 쥐었지만 결국 몰락하고 만다. 그는 권세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았던, 전장에 있어야 할 인물이었고, 강력한 무용을 지녔지만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쥔 사람에 의해 그 쓰임새가 바뀌는 검 자체였다. 잘못된 주인을 만나 끝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누구와도 뒤지지 않는 무력을 지녔지만 정작 분별력이 떨어져 스스로 제 목을 조르게 된 점은 참 씁쓸할 노릇이다.


    그나마 뒤늦게 근왕파로 전향한 덕에 이자겸과는 달리 고향에서 죽음을 맞을 수 있었고, 그 자손들도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건 천만다행인 일이다. 그러나 윤관의 밑에서 세운 공적과 이자겸의 밑에서 차지하고 있던 권력을 곱씹어 보면 허무한 최후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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