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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오깨무르프423
모리오깨무르프42323.08.17

유럽의 흑사병 사태는 어떻게 진정이 된 것인가요?

과거 중세유럽에서는 1400년대부터 엄청난 숫자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고 역사기록에서 보았습니다. 이렇게 무서웠던 페스트가 어떤 역사적 과정속에서 진정이 되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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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흑사병의 공포는 유럽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우선 예술의 후퇴를 가져왔다. 운이 좋아 살아남은 예술가들이 그릴 만한 것은 너무나 생생한 기록 즉 페스트가 남긴 공포의 기록뿐이었다. 이 시대에 수많은 흑사병 관련 작품이 전해 오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흑사병(黑死病, plague)이 페스트임을 모르는 독자는 안 계실 것이다. 이 병은 쥐벼룩이 옮기는 병이니 주위에 쥐를 없애면 걸릴 염려가 없다. 물론 21세기에 들어서 흑사병이 창궐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니 요즘 늘어가는 야생동물의 주요 식량인 쥐를 너무 못살게 굴 일도 아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흑사병이 사람과 사람을 통해 감염되는 바이러스성 역병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흑사병의 창궐에 쥐벼룩은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것이다. 동물학자 크리스토퍼 던컨과 사학자 수잔 스콧이 공동 저작한 《흑사병의 귀환》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책을 읽지 않았지만 서평만으로도 몸이 오싹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고 싶으니까 여기서는 중세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흑사병에 대해서만 알아본다.

    흑사병은 14세기 중반, 그러니까 1347년 무렵 킵차크(Kipchak) 군대가 제노바 시를 향해 페스트 환자의 시신을 쏘아 보냄으로써 유럽에 전파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그러나 이전부터 동방 원정에 나섰던 십자군 병사들이 보석과 동방 문화를 약탈해 오면서 부수입으로 한센씨병(나병)과 흑사병을 얻어 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때부터 순식간에 퍼져 나간 흑사병은 불과 수년 동안 시칠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과 프랑스, 유럽 중부의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을 거쳐 벨기에, 네덜란드로, 그리고 처음 선보인 지 고작 3년여 만에 스칸디나비아 국가에까지 이르렀다.


    앞서 살펴본 대로 흑사병은 쥐벼룩 외에 인간을 통해서도 전염되었기 때문에 도시에서 더욱 위력을 발휘했고, 그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믿으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수도원에서 가장 큰 희생자를 냈다. 이렇게 되자 겁에 질린 사람들은 사람을 찾기 힘든 시골 한적한 곳을 찾아 도망치듯 떠났다. 한편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공포에 떨게 하자 모든 외국 선박에 대해서는 항구에 내리기 전에 40일 동안 검역정선을 명령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40일 동안 환자가 발생하지 않은 배에 한해서 상륙을 허가한 것이다. 이는 꽤 합리적인 방안이었는데 페스트의 잠복기가 길어야 10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40일 동안 아무 일도 없다면 그 배의 선원들은 안전하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가 페스트의 확산을 크게 막은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기록에 따르면, 전 유럽 인구의 1/3 내지 1/4이 사망했다. 숫자로는 2500만에서 6000만 명에 이르는 유럽인이 이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두 숫자 사이의 간격은 페스트가 지속된 기간과 지역별 사망자 수의 집계 등의 차이에 기인한다. 여하튼 서유럽의 인구는 16세기가 되어서야 페스트 창궐 이전 수준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에도 페스트의 위력은 심심찮게 계속되었으니 1664~65년에는 런던 인구의 20퍼센트 정도가 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고, 19세기 말에는 중국에서도 엄청난 인명을 앗아가 버렸다.


    흑사병이 가져온 유럽인들의 공포와 사고의 변환을 잘 보여 주는 문학 작품이 있으니 바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다. ‘열흘간의 이야기’란 뜻의 이 작품에는 흑사병을 피해 시골의 한적한 별장에 몸을 숨긴 청년 셋과 처녀 일곱 명이 열흘간에 걸쳐 차례로 이야기한 기록 즉 100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편 흑사병의 공포는 유럽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우선 예술의 후퇴를 가져왔다. 예술이 기계가 아니라 사람의 창의력에서 비롯되는 것인 만큼 예술가들이 사라지고 난 후 그 자리를 메우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창의력을 높이기 위해 예술가들이 선호하던 여행은 이제 금기가 되었다. 따라서 운이 좋아 살아남은 예술가들이 그릴 만한 것은 너무나 생생한 기록, 즉 페스트가 남긴 공포의 기록뿐이었다. 이 시대에 수많은 흑사병 관련 작품이 전해 오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다음에 나타난 현상은 사회 계층의 급격한 변동이었다. 수많은 노동자의 희생은 지주의 파산으로 이어졌고,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임금은 급격히 상승했다. 게다가 금은보화는 아무리 쥐벼룩이 공격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이전에 비해 훨씬 많은 재산이 할당되었다. 이 시대만큼 졸부가 급격히 출현한 시대도 드물 것이다. 그리고 졸부들은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머리를 채우기보다는 겉모습에 신경 쓰는 법. 그들로 인해 패션 산업이 급격히 성장했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수도원 때문에 성직자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이로 인해 성직자의 공급이 선결 과제로 떠올랐다. 결국 이전까지 성직자 희망자에게 요구하던 자격 조건은 완화될 수밖에 없었고, 미신과 이단에 쉽게 흔들릴 만한 인물들도 이 시기에는 성직자로 양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결과 일반 백성들의 공포에 휩싸인 심리 상태를 이용한 온갖 미신과 이단이 출현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출처 : 세상의 모든 지식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흑사병의 원인이 부패한 공기가 문제라고 생각하여서

    향기를 내는 방향제를 몸에 지니고 다니며 좋은 냄새를 맡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부분에 방향제를 넣는 새의 부리와 비슷한 주머니가 달린 두건을 쓰고 있었고 환자와 가족들이 안에 들어 있는 채로 환자의 집을 아예 폐쇄하였다고 하네요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흑사병이 소멸하게 된 것은 현대화가

    진행되는 과정 때문이라는 것과,

    흑사병이 인체 내 유전자의 진화와

    박테리아가 생성이 되어 억제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유럽에서는 1720년 마르세유, 동유럽에서는 1770년 대 모스크바에서 발병된 이후 한번도 흑사병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위생 상태의 호전이 이유로 거론되지만 이 무렵 유럽에서 현재 대형 쥐들의 주류를 차지하는 시궁쥐와 이전까지의 주류였던 곰쥐들 사이의 생존경쟁이 벌어졌고, 그때 승리한 시궁쥐들에게 기생하는 벼룩이 전염력도 약하고 인간 피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학설이 유력하게 거론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