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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님은 어떻게 거북선을 만들 수 있었을까요?

상황이 심각했고, 돈도 많지 않았던 시절일것 같은데요.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돈이 드는 그 일을 어떤 방법으로 해낼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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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거북선 선체의 구조는 판옥선과 같습니다. 다만 거북선의 경우 돌격선이기 때문에 보다 더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좌우 양현을 지탱하는 가목의 숫자가 판옥선에 비해 많습니다. 또한 판옥선의 경우
      가목이 양현 밖으로 튀어 나온 위에 신방을 설치하고 포판을 설치하는데 비해 거북선은 보다 더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가목(멍에)으로 신방을 관통하여 끼워 맞춤식 공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체(선체)위에 방패판을 설치한 상장부분 역시 판옥선과 기본 구조는 동일합니다. 다만
      판옥선의 맨 위 청판위에 여장을 두른 곳(언방)부터 판자를 덮어 거북의 등딱지와 같은 뚜껑을
      만드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방패판을 설치할때에도 거북선의 경우 신방위의 기둥사이에
      끼워 맞춤식으로 방패판을 설치합니다. 거북선의 등딱지를 개판이라고 부르는데 개판은 좌우
      각각 11장으로 구성됩니다. 정조때 발간된 이충무공전서에는 통제영 거북선에는 개판에 좌우
      각각 12개의 포혈이 있다고 했고, 좌수영 거북선에는 각각 6개라고 했습니다.
      즉 거북선은 비전투원인 노꾼 뿐만 아니라 전투원까지 개판아래에 보호한 장갑함입니다.

      그러나 좁은 공간에 많은 인원이 탑승하는 단점이 있어 전투효율이 떨어집니다. 이는 임진란
      초기 처럼 왜 선단과 접전을 벌여야 할 경우는 방탄등이 중요한 돌격함이 필요하지만 이후
      도망치는 적을 추격 맹격을 가할때에는 상갑판이 넓어 전투원들이 마음대로 활동하기 좋은
      판옥선이 유리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거북선은 많은 숫자가 만들어 지지 않았다. 보통
      임진왜란 당시에는 3척, 그후 영조때에는 14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는 임진란 이후 거북선을
      오직 함대의 선봉이 되는 돌격선으로 사용 했기 때문인데 그러나 영조이후 점차 각 수영 뿐만
      아니라 모든 전초에 배치하기 시작하여 정조 6년에는 40척에 달하는 거북선이 취역하고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간에는 이순신이 직접 철갑선인 거북선을 개발했고, 이에 직접 탑승했을 거라는 통념이 있으나 사실 조선 수군의 주력은 판옥선이고 이순신도 거북선을 처음 개발한 인물은 아닙니다.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태종때부터 있었고, 태종실록에서 언급되는 귀선과 이순신이 건조했다는 귀선이 같은 종류의 배인지는 현재까지 불분명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순신장군은 섬마다 토지를 개간하고 염전을 통해 소금을 생산하여 중앙정부의 도움없이 자력으로 군비를 충당하고 거북선을 만드는데도 사용하였습니다. 이런면이 일반 장군들과는 다른 선견지명을 가진 장군이었기에 따르는 장군들과 병사들이 많았고 반면에 엄격한 군율을 통해 병사들을 오히려 다둑이는 역할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