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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향고래의 노래
기쁜향고래의 노래23.09.16

대왕암은 어떤 근거로 문무대왕의 릉이라고 하나요?

울산과 경주 경계 근처의 대왕암은 삼국을 통일하여 통일 신라를 이룬 문무대왕의 능이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대왕암은 어떤 근거로 문무대왕의 릉이라고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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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9.1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다고 합니다.

    대왕암(大王岩)은 경상북도 양북면 봉길리 감포 해변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으며,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바닷속 왕릉 또는 산골처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죽어서도 용(龍)이 되어 신라를 지킬 것을 맹세하였으며, 동해(東海)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이에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을 화장하고 대왕암에 장사를 지냈다. 대왕암은 문무왕과 관련하여, 감은사, 만파식적, 이견대와 연결되는 하나의 큰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문무왕이 죽자 신하들이 왕의 유언에 따라 대왕암에서 장사 지냈고, 문무왕은 신라를 지키고자 용이 되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 『삼국유사』 ,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문헌에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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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록과 대조해 감은사지나 이견대 등의 용도, 구조 및 위치로 보아 대왕암이 바로 승하한 문무왕을 장사지낸 문무왕릉임은 거의 이론의 여지가 없으며,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의 용이 된 부왕을 위해 인근에 왕사 감은사를 세우고, 용이 드나들수 있는 수로까지 파놓았는데 이 수로가 동해 바다로 이어져 대왕암으로 직결됩니다.

    신문왕이 만든 전망대인 이견대 역시 대왕암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장소에 있으며, 이 대왕암은 오랫동안 댕바우라 하여 문무왕의 왕릉으로 알려졌고 해녀들은 이 근처를 신성시해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1964년 10월 24일 한국일보는 문화재청과 함께 신라오악학술조사 사업을 통해 문무왕릉에 대해 조사하다 문무왕릉이 대왕암 바위라는 것을 알아내게 되며 이를 조사하게 됩니다.

    조사내용으로 보면 바위 아래 공간이 발견되었으므로 대왕암 내부 복판 바닥에 관이나 유골상자를 안치할 시설을 안치하기 위한 홈을 파고, 그 위를 복개석이라 칭한 거대 바위 덩어리를 덮었다고 발표합니다.

    이 의견을 보면 대왕암은 물속에 유골을 모신 수중릉의 개념과 일치, 당시 직접 몸으로 조사했는데 결과 바위 아래 어느 정도 틈새나 공간이 있음을 알고 바위 아래 유골과 부장품을 모신 공간이 있다는 학설을 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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