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을 위정척사파 라고 하는데 위정척사파에 대해 알려주세요
역사책을 보다 구한말 최익현은 위정척사파라고 하는데 위정척사파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싶습니다. 관련된 인물들도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개국 후 개화를 반대하고 전통적인 것을 지키며 그것을 민족 주체 의식으로 여긴 사람들로, 대개 유교 사상에 젖은 이항로, 기정진, 최익현 등 유생이었습니다.
출처: 학생백과 위정척사파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위정척사’는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배척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래 정척사론은 남송대 사상적으로는 불교와 정치적으로는 여진족에게 위협을 받던 시기 주희에 의해 정립된 이념입니다. 조선의 위정척사론은 조선 후기 서학이나 서양 문물, 외세의 위협을 배척하고 성리학적 가치를 지키려는 사상적 운동을 말합니다.
문화와 야만,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는 화이의식에 기반을 둔 위정척사론에 따르면 서양 문물은 사악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들은 조선의 올바른 성리학적 가치를 어지럽히고 조선의 존립을 뒤흔든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천주교는 평등사상, 조상에 대한 제사 거부 등 당시 성리학적 국가 질서에 반대되는 내역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위정자들로부터 큰 반감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1866년(고종 3) 병인박해 때 천주교인 다수와 프랑스 선교사들을 처형한 일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군대가 침입하여 병인양요가 발생하면서 이항로, 기정진 등의 학자가 적극적인 척사론을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 묘가 파헤쳐진 오페르트 도굴 사건으로 민심은 더욱 위정척사에 동조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흥선대원군은 1871년 신미양요 직후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외세를 배격하자는 주장을 널리 유포하였습니다.
이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자 왜양일체론이 등장하며 위정척사 운동은 그 대상이 일본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유생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결성하여 외세 특히 일본에 대항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났습니다. 이항로의 제자인 김평묵, 유중교, 최익현, 기정진을 이은 기우만과 송병선 등이 일제의 침략에 대하여 위정척사를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위정척사 운동은 외세로부터 조선을 구하자는 취지로 자존 의식을 배양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나 동시에 조선 초기부터 지속되어 온 구지배 체제를 유지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위정척사파> 우리 문화를 지키고 서양 문물을 배척하고자 주장하는 사람들 함부로 외국과 교류하면 우리 문화를 망치고 경제적 손해도 볼 수 있으니 통상 수교를 거부하지도 주장하는 사람들을 위정척사파 라고 합니다.
위정척사란> 옳은 것은 갖고 나쁜 것은 버린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들은 중국과 우리의 전통문화를 옳고, 서양과 일본의 새로운체제는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최신형이 강화도 조약에반대하며 올린 상소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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